차갑지만 치열했던 영업 이야기
너무 거창한 말로 표현했나 싶지만 이십여 년을 영업 현장에서 수많은 대형 입찰 건을 진행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느꼈고 몸에 각인된 말이다.
쉽게 표현해서 ‘뭐든지 먹어 본 사람이 더 잘 시키고, 해 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이다’라는 세상의 진리 같은 말과 비슷한 뉘앙스라고 할까. 영업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몇 시간, 아니 몇 달간 노력을 기울여도 때가 맞지 않아서 계약이 되지 않을 때도 있고, 몇 달 동안 공들여온 인적 관계가 인사이동이나 여타 사건으로 인해 나와 적대적인 업무 담당으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다. 몇 달 동안 잘 만들어 온 상품 홍보와 전략이 제품 단종이나 결함 등으로 치명타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규모가 큰 영업을 준비할 때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영업의 시간 동안 나에게도 이러한 천지인의 기회는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2015년에 있었던 한국OO공사의 업무용 차량 입찰과 관련된 영업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금도 단일, 단기간 물량으로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입찰하는 사례는 많지 않은데, 해당 공사의 입찰은 관련 모든 제조사와 렌트사에게는 초미의 관심 대상이었다. 입찰이 있기 한 해 전부터 나는 부서장과 임원에게 해당 업체의 입찰을 보고하고 어떻게 접근할지에 관해 논의했다. 당시 우리 회사와 팀에서는 우리가 그런 큰 건을 따낼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한 번도 최대 물량을 해 본 적이 없고 가격적인 면에서 경쟁사와 격차가 워낙 컸고 상품성 에서도 열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이 건을 우리가 당연히 따내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한번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정부가 공사·공기업 지방 이전 정책을 펴면서 그 회사도 전주혁신도시에 자리 잡게 되었다. 상견례 차원에서 담당자와 방문약속을 했다. 전주로 내려가는 차에서 앞으로 1년간 어떤 전략과 마음가짐으로 장기전에 임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할 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부딪쳐 보자. 그들의 니즈가 무엇인지,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먼저 파악해 보자.’ 이런 복 잡한 생각 속에 어느덧 웅장한 정문에 다다랐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사무실 스타일이나 직원들의 복장에서 공무원 같은 느낌이랄까, 어딘지 모르게 지휘체계나 사무실 배치 등에서 관공서에 방문한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상견례를 한 지원팀의 담당과장님과 팀장님이 거의 이삼십 년간 직장생활을 하신 분들 같았다. 직원들이 대부분 현장직으로 입사해 지사와 본사를 두루 거쳐 현장과 관리 업무를 하면서 최소한 이삼십 년 넘은 분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공무원 같은 조직문화와 업무 스타일이 자연스레 젖어 있는 게 당연했다. 처음 만난 담당 과장님은 내 또래의 현장 경험이 많으신 분이었다. 성격이 유하고 친근감이 남달랐다. 대개 처음 업체를 방문할 경우 첫인상이 정말 중요한데, 담당과의 궁합이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사조그룹이나 캡스 사례에서 말했듯 그 중요성은 새삼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곳은 조금 특이했다. 해당 업체의 입찰과정에 차량선정위원회라는 별도 독립기구가 있었다. 입찰과정의 투명성, 차량 선정방법, 입찰 방식 결정 등에 노사가 동등한 인원으로 구성된 그 위원회에서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이 선정 위원회 구성원과의 교류와 피드백이 이 프로젝트의 승부를 가른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차량선정위원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노조 측 인사들부터 먼저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 재방문하면서 노조의 복지부장과 부지부장 등 차량선정위원회 핵심 인사들의 교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방문해 노조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차량 이야기, 회사 이야기, 지부 상황 등 도움이 될 만한 아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점점 다가갔다. 특히 일부러 비 오는 날 노조 사무실에 방문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핑계로 사무실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를 하기도 하면서 사적인 관계 형성에 주력했다. 노조 측을 먼저 공략한 이유는, 전체적인 차량 선정권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회사 분위기를 느꼈고, 노조의 입김이 세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 감은 역시나 여러 가지 우선 혜택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고 시승 차량 제공 등 우리 회사와 차량에 대한 관심을 먼저 일으킴으로써 입찰의 분위기를 주도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물론 사측 담당 과장과 팀장에게도 수시로 접촉하면서 어떻게 하면 입찰에서 우선권을 잡을 수 있을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측 담당 과장과 차 한잔을 마시는데 그동안 나의 부단한 노력을 가상하게 느꼈는지 그의 입에서 어렵게 말이 나왔 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 쓰고 있는 현장 차량에 대한 현장 직원들의 불만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지, 그걸 해결 하면 차량 선정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입찰에서 어떻게 가격경쟁력을 가져가야 할지(그 당 시 최저가 입찰이었다), 어떻게 렌터카 회사와 전략적으로 연계할 지 그런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담당 과장의 그 말은 내 머릿속에 큰 울림으로 왔고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었다. 가격도 인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마음을 사는 것, 제일 중요한 사용자의 편익과 일상에서의 불편함을 없애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그때의 나는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 돌아가서 기본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이 회사에 우리 차량을 공급하고 싶고, 그러려면 차량선정위원회의 까다로운 선정항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 항목은 가격과 성능, 편의성, 업무 부합, 내구성 등 많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적인 부분이다. 모든 회사의 차량은 대동소이하다. 출력이나 성능은 물론이고 편의사양이나 공간 활용 등 하드웨어적인 부분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감성적·업무적 만족도를 누가 더 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부분을 찾아서 차별화 하는 것이다.’ 그때 내가 깨달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결론을 내고 담당 과장에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과장님이 저를 좀 도와줄 수 있는지, 몇 개 지사의 현장 직원들과 개별 인터뷰를 해서 차량 운행상 느끼는 불만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싶다고, 또 가능하다면 현장의 차량 운행 스타일도 직접 보고 싶으니 가능한 지사를 연결해 달라고. 담당 과장은 흔쾌히 자신이 전에 근무했던 지사의 지사장과 팀장 등 몇 분의 연락처를 제공해 주었고 직접 가 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몇 군데 현장을 직접 방문하면서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맨 처음 지사를 찾아갔을 때 느낀 점은 생각보다 현장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국토를 정확하게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우리가 쉽게 생각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일이, 사실은 너무도 중요하고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고 새삼 현장 직원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현장 직원들이 타는 차량은 3년 전 공급된 K사의 소형 SUV 차 량이었다. 험준한 산악과 비포장도로를 자주 다니다 보니 무엇보다 내구성과 승차감, 공간 활용성이 요구되었고 실제 사용자들의 불만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측량팀장님과 현장관리 직원들을 인터뷰하면서 차량에 대한 불만을 조목조목 적다 보니 ‘현장 속에 해답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직원들은 차량에 측량 대, 비상 사다리 등 최소 30~40kg 이상 되는 각종 측량기구를 항상 싣고 다녔기에 소음과 진동, 안전사고 등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실제로 장비를 무작위로 싣고 다녀서 차량이 파손되는 일까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점을 개선할 수 있을까? 거기에 착안해서 나온 것이 바로 우리가 제안한 ‘맞춤형 트렁크 장비 수납 패키지’였다. 특장업체와 협업해서 우리 회사의 캡티바 차량에 장비를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패키지 장치를 단 것이 었다. 측량대, 겨냥대, 각종 기구의 충격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는 흡음재를 대고, 넣고 빼기 쉽게 하는 아이디어였다. 몇 차례 시제품 테스트를 거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패키지 장치를 만들어 냈다. 차량선정위원회의 심사가 있던 날, 현장에서 차량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히든카드로 숨겨 놨던 패키지 장치를 공개했을 때 위원들의 흥분된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실로 차별화된 전략이 주효했다.
물론 입찰에는 여러 가지 항목과 변수가 작용해서 선정되지만 현장 직원들의 애로를 풀어 줬다는 것과 직원 편의 중심으로 접했다는 점에서 우리 회사가 많은 점수를 딸 수 있었다. 3차에 걸친 힘든 입찰 과정을 거쳐 그해 가장 큰 입찰에 우리가 성공했다. 907대라는, 단일물량 최대 실적을 거두었다. 나의 특판 생활 이십여 년간 가장 자랑스럽고 최고의 성취감을 준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의 노력과 아이디어, 그리고 협업이 있었다. 서두에 말했듯, 천지인(天地人)의 도움이 절묘했다. 담당과장님과 노조 관계자들의 격려와 지원, 지사 현장 직원들의 솔직한 의견과 아이디어, 때마침 적극 협조해 주었던 특장 업체, 그리고 마지막까지 히든카드로 비밀을 보장해 줬던 렌터카 관계 직원들, 이런 때와 장소와 인력들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큰 계약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후배 직원들이 그런 큰 물량을 어떻게 따낼 수 있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작품은 하늘의 기다림과 땅의 기운, 그리고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