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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한 Dec 28. 2022

절망을 주는 것도   희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다

차갑지만 치열했던 영업 이야기

가끔씩 영업을 선택하는 직원들에게 ‘왜 영업을 하려 하는지’와 ‘영업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물어본다.

밋밋한 직장생 활보다는 다이내믹하고 본인의 노력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또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성취를 얻는 것을 좋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영업은 사물과 사람,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을 잇는 커넥티드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 보니 운명적으로 많은 상황과 사람을 맞닥뜨리게 된다. 모든 일이 항상 내 맘같이 되지는 않듯이 영업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내가 처음 특판팀에서 관리업체로 부여받은 회사는 대우그룹의 메인 업체인 대우건설이었다. 그룹사에서 차량 운영 및 구매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던 중요한 업체이다. 영업을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 테스트를 거기서 받았다. 당시 대우건설은 이 십여년간 대우차만 사용해 왔는데 IMF 사태를 맞으면서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금호그룹으로 인수되었다. 점점 그룹 차원의 구매 시스템이 변경되면서 더는 대우그룹의 일원이 아닌 개별 업체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마다 대우차 중심으로 구매가 이뤄지다가 대표이사가 금호그룹에서 지정되고 임원들도 물갈이가 되었다. 이제 더는 대우차가 아닌 현대차를 구매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상황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그룹 의식이 남아 있는 회사의 임원들은 그래도 대우건설은 대우차를 사 줄 거라는 근거 없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담당자로서 이런 변화의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상사에게 보고드 렸지만 그때마다 그러지는 못할 거라는 게 임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해 신임 임원들에게 지급되는 차량으로 현대차의 그랜저가 결정된 것이다. 우리 회사 차량이 배제되면서 이제 더는 ‘대우’라는 그늘에 있을 수 없다는 사회 전반의 흐름을 인식하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첫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차량 담당자였던 과장님에게 달려가 선정 배경과 양해의 말을 전해 들었다. 오랫동안 차량 구매팀에서 관리와 구매를 해 오셨던 베테랑이었다. 물론 담당자였던 나의 실책도 있었다. 곧바로 이 사실은 회사에서 빅 이슈가 되었고, 내 위의 부서장과 선임자는 대표이사의 호출과 질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표이사는 그룹 계 열사의 차량 변경이라는 단순한 이 사건을 전체 대우차의 이탈이라는 대형 사고가 되는 전초로 엄중하게 본 것이다.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다. 대우그룹은 채권단의 지휘 아래 그룹이 해체되면서 구심점이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도 우리의 요청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팀장과 나는 일말의 변경 가능성을 위해 대우건설 차량담당 과장님을 식당에서 별도로 만나 설득해 보기로 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서 차량 담당 과장님은 변화되고 있는 계열사의 분위기와 더는 협조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재차 피력했고, 이에 팀장은 술에 취한 나머지 반협박 분위기로 상황을 몰아갔다. 점점 분위기가 격해졌고 차량담당 과장님은 내 입장을 봐서 왔는데 너무 무례하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이 이해가 가는게 우리 팀장이 너무 무례했던 것 같다. 담당 과장님은 나가 버렸고 팀장은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곧바로 뛰어나갔지만 이미 담당 과장님은 계산을 마치고 막 택시를 타고 있었다. 택시 앞을 가로막고 나는 과장님께 죄송하다고, 팀장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상한 담당 과장님은 매몰차게 떠나 버렸다. 계속해서 전화를 드렸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타고 뒤쫓아 갔다. 담당 과장님이 어디에 사는지 대충 들어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과장님이 사는 아파트 앞에서 동호수를 몰라 계속해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제발 만나서 오해를 풀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기고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 담당 과장님은 끝내 응답하지 않으셨고 나는 돌아서야 했다. 그 당시 내 마음은 지난 이 년간 담당자로서 노력해 왔던 시간과 열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삼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진짜 뜬눈으로 밤을 새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때의 절망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든 것이 자책이었고 내가 영업을 잘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심한 자괴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새벽 일찍 출근해서 대우건설 차량팀 사무실로 바로 갔다. 차량팀의 현장 직원들은 나를 보고 모두 걱정된 눈빛을 보냈다. 한숨도 못 잔 표정이 역력했는지 진한 커피를 타주셨다. 이윽고 차량 담당 과장님이 출근하셨는데 나를 보고도 개의치 않고 본인의 자리로 가셨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울컥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어제의 일을 사과드리고 우리 회사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묵묵히 듣고 계시던 과장님은 조용히 내 눈을 보시면서 아침 먹으러 가자고 했다. 묵묵히 걸어가는 그를 따르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경쟁에서 우리 차가 선정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간적인 면에서 낙오자나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이 그리한 게 아니었나 싶다. 조용히 식사하면서 담당 과장님은 나에게 약속할 수는 없지만 다시 한번 위에 보고드려 보겠다고 했다. 또 어제 자신의 집 앞까지 와서 기다리던 나를 보면서 아직 그룹의 끈끈함을 잃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했다. 순간 눈물이 울컥 나면서 나도 모르게 미안함과 서러움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그분은 은퇴하셨고 나 또한 그 업체를 담당하지는 않지만 대우그룹이 해체된 그 이후로 담당 과장님이 있던 기간까지 대우건설에서 우리 차량이 50퍼센트까지 구매를 이어 가는 선방을 했다. 수많은 입찰과 경쟁 속에서 상품이 나빠서, 가격이 달라서, 구매성향이 변해서 우리 차가 선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진정 노력하고 진심으로 원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마음을 조금은 변화시킬 수 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뛰어야 한다. 그날 대우건설의 담당 과장님을 통해서 나는 절망과 희망을 모두 보았다. 누구나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갑 아닌 갑이 되고, 을 아닌 을이 될 수 있다.

포기하지 말자. 영업은 항상 그렇다. 최선이 아니면 아닌 것이 아니라 차선을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지나고 보면 아쉽고 아련하고 참 눈물 나지만 누군가를 영원히 미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람을 통해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보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닐까. 설익은 철학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영업에서 사람이 답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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