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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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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20일 시골 골짜기의 제일 끝집으로 이사왔을 때

이 집은 수년간 방치된 채 집 전체는 축축했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가는 이사청소업체가 '길이 없어요! 여기 집이 있다구요?'라고 전화를 했을 정도로 좁은 길만을 드러낸 채 흙으로 가려져 있었고 마당은 그야말로 밀림을 방불케 했다.


당시 나의 선택은 그랬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살면서 차차 하기로 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조건만 맞으면 된다! 였는데

너무나 기가 막히게,

마치 신의 설계가 작동한 것처럼 들어맞았기 때문에 난 주저없이 이 곳을 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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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처음 이사왔을 때 밀림상태 / 중> 마당의 나무와 키큰 풀들을 제거하고 / 우> 길을 뒤덮던 흙을 퍼내니 길이 나왔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란

집 양옆으로 집이 없을 것, 집 뒤로 숲이나 산이길 바랬고 집옆으로는 물이 지나가고 집앞쪽으로 넓은 마당과 함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길 바랬었다. 여기에 보태서 마을로부터 멀지 않지만 독립적인 공간이길 바랬고 전원주택단지처럼 똑같은 집은 싫었다. 목조보다 콩크리트집이길 바랬고 (여기서부턴 정말 꿈이었다. 내가 집을 지으면 이렇게 지어야지 했던 꿈.) 층고가 높은 집에 연구실과 주거지가 분리되어 있고 집전체가 유리로 된 듯 창이 넓고 높은 집이길 바랬다.


나는 지금 신기하고 신비롭게도 얼추 그런 집에 살고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작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조금씩 손보고 있다.

나무를 베어 키를 낮추어 하늘면적을 얻었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가는 흙을 걷어내니 5톤트럭도 지나다닐 정도로 넓어졌고 집 내부의 조명부터 벽지, 수전 등등은 모두 손봤고 뭐... 그런 것들 뿐이었다.

스크린샷 2025-10-15 175927.png 층고가 높은, 통창의 집필실과 주거지가 중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 마당도 전체를 다 낫과 예초기로 밀고서 잔듸를 깔려고 했는데

마당에 하려던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작년 가을부터 겨울, 봄, 여름 사계절의 순환을 거치며 언제 어떤 녀석들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지 그대로 놔두며 기다렸고 지킬 것은 지키고 없앨 것은 없애는 시간을 보내왔고 보내고 있다. 원래 하려던 짓은 여기에 이렇게, 저기엔 저렇게 뭔가를 꾸미고 만들려 했었지만 글을 쓰느라, 엄마의 유산 계승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코칭에 할애해야 할 시간이 점점 늘어나 마당을 돌볼 새가 없었다. 사러 갈 시간도 없었고.


1년여가 지난 지금,

자연이 자연을 허락할 수 없는 어떤 의도와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일이 많아지고, 이 작은 마을, 그 속의 작은 집에 콕 쳐박혀 읽고 쓰고 코칭하는 것만으로도 난 벅차고 신비롭고 행복한 시간들이 연속되면서 일상 전체에서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사, 또 감사... 게다가 경이롭고 황홀한 '자연이 주는 메세지'를 매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감히 언급하건데,

천상의 옥좌에서 탄식해 마지 않으며 천지를 재건시키던

제우스의 호령은 저 맑고 높은 하늘 위에서 이제야 숨을 고르는 느낌,

헤라(Hera)의 우유의 길(주1)은 다름 아닌 이 곳으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

아테나(Athena, 주2)의 이성이 매일 새벽 눈뜨는 내게로 빛처럼 내려오는 느낌,

가이아(Gaia, 주3)가 대지와 만물을 품는 따스함에 나까지 품어주는 느낌에 폭 안겨 있는 듯하다.


KakaoTalk_20251011_194923822_04.jpg 한달새 마당 한쪽에 순식간에 군집을 이뤄버린 루크베키아

그러다 가을의 중심이 끝자락으로 흘러가는 지금...


나의 하는 짓은

오래토록 뿌리를 내린 구근에서 뽑아올린 잎들에 감탄하며 그 옆의 풀들을 뽑아주는 것이고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싹을 올리고 꽃대를 높이며 군집을 이뤄버린

그저 이름모를 노란꽃인 줄만 알았던 루크베키아를 뿌리째 파서 마당 귀퉁이 허전한 곳으로 옮겨주는 것이다

루크베키아는 번식이 너무 빨라 순식간에 군집을 이뤘다.


작은 해바라기 닮은 녀석은 자세히 보면 모양과 색이 다르다.

어떤 녀석은 홑겹으로, 어떤 녀석은 겹겹으로, 어떤 녀석은 가운데 고동색으로 무늬를 만드는 치명적인 노랑의 아름다움과 강인하게 뿌리로 여기저기 뻗어가는 속도에 매번 마당에 나갈 때마다 나는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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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오른쪽이 휑한데 라일락이 올라왔으니 내년엔 꽃을 피울까 기다려지고

봄에는 작약이, 여름에는 비비추가, 그리고 가을에는

그 옆 큰 바위아래와 마당 귀퉁이에 녀석들이 있으면 마당이 노랑노랑할 듯하여 이들을 옮겨 심었고 새로 싹을 내는 잎들은 마당 입구쪽으로 군집을 이루도록 옮겨 심고 있다. 작년 가을 이사와 지천에 널린 맥문동의 씨를 곳곳에 뿌려뒀는데 이 녀석들도 이제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내년엔 더 많아지겠지.


마당 수돗가 한켠에 어떻게 여기서 피어났는지 한동안 날 자주 불러내주었던 주황의 노란점이 불씨같던 범부채꽃은 이제 씨방을 열고 씨를 뿜어내릴 기세다. 꽃도 불씨처럼 강렬히 타오르더니 씨도 검은 딸기(blackberry lily)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신비롭다. 녀석들이 맘껏 번식하라고, 그 옆의 풀은 자라는대로 뽑아내는 게 요즘 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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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단 1개의 싹이 잎을 뻗더니 저렇게 이쁜 꽃을 여러 송이. 이제 씨방에서 씨를 쏟아내면 내년엔 더 많이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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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채꽃의 씨 (일명, 검은 딸기)


애초에 내 머리속에 잔디를 심고 돌길을 만들고 여기는 수국, 여기는 뭐 저기는 뭐 했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흙을 뚫어낸 아름다운 녀석들을 살리고 지키고 어디선가 날아와 터를 잡은 녀석들에게 작은 터를 내어주어 번식하게끔 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녀석들은 늘 내게 뭔가를 알려준다.


넓고 강인한 잎으로 기세를 보이며 가을 내 쑥~ 자란 루크베키아 뿌리를 다치지 않게 호미를 깊숙하게 넣어 흙째로 옮겨도 옮긴 날로부터 하루이틀은 바닥에 모든 잎을 늘어뜨리며 곧 죽을 듯이 시들거린다. 그러다 잎 몇개를 그대로 문드러뜨리며 스스로 떨궈내는데 그러다 3~5일이 지나 가만... 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초록초록하고 앙증맞은, 눈에 보일까 말까 한 솜톨까지 신비로운 새로운 싹이 정중앙으로부터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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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까지 순식간에 번식하여 온통 루크베키아가 싹을 돋운다. 마당끝 가장자리마다 이식해 준 루크베키아/중앙에 새롭게 돋아난 싹(우)


우리도 이들처럼 여기서 저기로 옮겨질 때마다, 이번 추석처럼 긴연휴가 찾아왔다거나 예상치 않은 상황이 날 가격했다거나 이사를 했다거나 일상의 일탈을 맞이하면 흔들린다. 시들시들하다. 아프고 괴롭고 흔들리는 자신을 바라보니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흔들땐 흔들려줘야 한다.

흔드는데 흔들리지 않으면 부러진다.

흔들려야 정중앙, 제자리에 새로운 잎이 돋아난다.

흔들리는 속에서 지금껏 없었던, 내 안의 작은 창조가 일어난다.

아주 작은 행동일수도 있고, 발견일수도 있고, 그저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흔들리고 문드러지는 속에서 돋아난 새로운 잎은 새로 부여받은 터에 자기의 뿌리를 다시 내린다.


나도 지키고 있어야 할 뿌리를 단단히만 지키고만 있으면

외부로부터의 이동과 가격에도 새로운 잎을 생성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흔들리고 문드러지는 헌잎에 왜 흔들리냐고, 왜 문드러지냐고 따지고 지키려는 열심에도 불구하고

흔들려야 할 땐 흔들려줘야 그리로 갈 영양분, 집중이 새로운 잎을 돋우는 데로 사용된다.


이동과 가격은 날 창조시키는 힘이다.


뿌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그 곳에서 탄생할 수많은 욕구들이

순차적으로, 하지만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번영된다.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고

여기서 이렇게 가격당했다면,

번영을 위해 연속적으로 태동이 일어나는

'일상의 기적'에 서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새로운 잎이 하나만 돋는 게 아니다.

여기서 돋는 것 같더니 저기서도 꽃대가 올라온다.

뿌리는 하나인데 꽃대는 여럿이다.

나는 하나인데 나의 욕구는 여럿이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하지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뤄진다.

이것이 동시성과 순차성이야말로 곧 전체성임을, 루크베키아는 보여준다.


흔하디 흔한 루크베키아에서 난 동시성과 연속성을 체감한다.

나의 욕구도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저기서 또 그 다음엔 거기서 태동할 것이다.

순서대로... 이뤄질 것이니

난 나의 뿌리를 단단히 지키고만 있으면 된다.

뿌리만 지키고 있으면 꽃대가 하나씩 오를 것이고 그 옆으로 군집도 이룰 것이다.


하나의 욕구는 또 다른 욕구를 생성시키고

하나의 뿌리는 그 다음 뿌리로 이어져

넓은 대지에 나만의 영토를 만들게 된다.


계승.은 이런 것이다.

뿌리가 튼튼하면

나같이 못된 인간 하나가 모두 베고 밀어버렸더라도

곧 자신의 계절이 올 것을 믿고 다시 잎을 내어 존재를 드러내고 터를 일군다.


자연은...

수많은 책에서 배운 진리를

아무런 의도없이 내게 알려준다.


난... 시골이 참 좋다.

겨우 1년 살고서 뭘 알겠냐는 타박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난 시골에 오길, 그대로 인위적인 가공없이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살리고 지키는 지금의

배움과 삶이 너무나 고귀하고 가치롭고 충만하다....


자연은 그래서 나의 교과서다.

난 그래서 교과서 1장을,

이제 막 넘긴 어린아이다!


주1> 제우스가 아기였던 헤라클레스에게 잠든 헤라의 젖을 물리자 그 때 헤라의 젖이 뿜어져 나와 젖빛의 길, 그러니까 은하수라 불리는 우유의 길이 만들어 졌다는데 이 길의 양쪽으로 주신(主神)들의 신궁이 줄지어 있고 이들은 이렇게 모여 살며 세상을 이치로서 다스렸다.

주2> 아테나 : 지혜의 여신으로 이성, 통찰을 상징한다.

주3> 가이아 : 대지의 여신


지난 7년, 매일 새벽 읽고

지난 3년 매일 읽고 써내려간 시간들...

이렇게 글이 책으로 만들어진 모든 과정을 작가님들과 나눕니다...

브런치 글을 자기 자신의 인문학에세이로!


# 신청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1gNX7wQZ2kP1lv_ykYHGS9H6NH0FvNjmhnKZQBx7AIko/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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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연재]

월 5:00a.m. [짧은 깊이]

화 5:00a.m. [엄마의 유산]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짧은 깊이]

금 5:00a.m. [나는 시골에 삽니다.]

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일 5:00a.m.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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