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이사 후 맞은 첫 가을.
밤으로 놀았고
밤마다 놀았고
밤때문에 행복했던,
'밤'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던 두어달.
우리집 마당 왼쪽 길가에는 어마무시하게 큰 밤나무가 있다.
길가에 쏠쏠하게 밤들이 톡톡 떨어지고
그것을 줍는 재미에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쫄래쫄래 나가 밤을 주워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둘러보니 우리집 왼쪽 저 커다란 밤나무를 따라 숲쪽으로 밤나무는 계속 이어졌다. 시골초년, '시골바보'인 나는 밤이 열려야 밤나무인 줄 알기에 밤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1년이 다 되도록 저 나무들이 밤나무인 줄 몰랐던 것이다. 줄잡아 10여그루는 넘는 듯해서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기게 됐고 주워오는 밤의 양은 매일, 아니, 아침과 점심이 다르게 늘어갔다.
그저 설렁설렁 집주변을 걷는데도 바지 양쪽에 넣는 것도 모자라 겉옷 주머니가 터지도록 담아오더니 며칠 지나자 주머니로도 모자라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게 되었고 차차 봉지 1개로도 부족해 2개씩 들고 나가곤 했다.
그런데
왜 마을 사람들은 '밤을 주우러 안 오지?'
오호...궁금했다.
그리고 알았다.
뒷 숲으로 들어가면, 그리고 길가 비탈을 넘어가면
온통,
진짜 온~~~~~~~~~~~~~통 밤나무였다.
한달내내 집앞에서만 밤을 줍던 내겐 완전 신세계였다.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마을분들이 다들 다녀가신 흔적(이는 밤송이의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수십? 수백?개의 밤송이를 지천에 떨구었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줍고 내가 줍고 다람쥐가 먹고도 남을 정도의 양이었다.
참, 다람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천에 다람쥐가 먹다 남긴 밤들이 수북했고 또 도토리나무 역시 밤나무만큼 많았다!!!
나는 점점 용감해졌고 빨라졌다.
집옆 길가의 비탈을 오르게 됐고 그렇게 비탈을 오르니
세상에~~~~~~ 엄청 높아 보였는데 5분이면 오를 정도로 난 빨라졌다.
비탈의 경사는 거의 75도 정도.
꽤 가파르지만.
난,
삼성리 날다람쥐.ㅋㅋ
내가 날쌘 매의 눈으로 밤을 주워 담는 것을 보고 아랫집 아저씨가 붙여준 별명이다.
이제 비탈은 아무것도 아닌 높이였다.
그 곳에 오르니 진짜 밤천지!!
밤이 천지에 지천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매일 오르며 밤을 주워 날랐고 (진짜 말 그대로 주워 날랐다.)
너무 재미나고 너무 신기하고 너무 오르고 싶어서
글쓰다가 틈만 나면 비탈을 올라 주머니에, 비닐에 밤을 담았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를 듯.
남들이 '밤줍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라던 말은 진리에 가까운 진실이었다!
이건 해본 자만이 아는 특급재미라고 하겠다!
한달이 지나 아래에서 위를 보니
세상에~~
내가 오른 비탈에 나만의 계단이 생겼다.
후진 핸드폰의 카메라가 계단을 선명하게 담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며 놀았는지는
내.눈.에. 선명하게 드러난 비탈의 계.단.이 말해준다.
밤을 주워보며 발견했다.
밤은 씨앗이다.
씨앗이 영글면서 다 다른 모양으로 자랐다.
어떤 나무에서는 굵은 밤만 떨어진다.
또 어떤 나무에서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밤만 떨어진다.
밤마다 이름이 있어서 이건 무슨 밤, 이건 토종밤 뭐라고들 마을 어르신이 알려주셨는데 까먹었다.
암튼 내 눈에
하나의 자궁 속에 혼자만 살찌고 나머지를 쭉정이로 만드는 녀석도 있었고
어떤 자궁에선 똑같은 쌍둥이, 세쌍둥이가 튼실하게 들어있는 녀석도 있었고
또 어떤 자궁에선 이미 썩어문드러진 녀석도 있었다.
채 익기도 전에 떨어진 녀석,
이미 익었지만 속이 빈 녀석....
저마다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은 환경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란 형제, 친구도 저마다 다르다.
선인이 되기도 악인이 되기도 한다.
그냥... 나와 내 주변같다....
여하튼 매일 주워모은 양이 쌓여 주방쪽 테라스를 가득 채웠다.
대형욕조만큼 모아진 밤은 밤놀이의 증거다.
밤벌레도 자유롭게 밤을 뜯어먹으며 테라스에서 놀았고
나도 놀았고
덩달아 주변도 놀게 하고 싶었다.
양의 축적은 늘 놀랍다!
양의 축적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즐겁게 한다.
매일의 봉투 하나, 매일의 걸음 하나, 매일의 오름 한번이
수십명 -정확하게 사진속의 밤정도 양을 20명에게 2번씩 - 보내고도 남았으니까.
밤도 씨앗이다.
씨앗은 꿈이다.
어떤 순간,
씨앗을 보냈다?
꿈을 보냈네!!
화들짝 놀랐다.
한달여전에 마당에 핀, 봄에 날 즐겁게 했던 작약이 씨를 떨궈
지인들에게 작약씨를 보낸 적이 있었다.
난 또 씨를 보낸 것이다.
꿈을 보낸 것이다.
꿈이 퍼진 것이다.
꿈이 모이고
모인 꿈이 연결되고
그렇게 꿈이 꿈을 이어
우리는, 세상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닐까.
감사히도 밤을 받는 모든 분들은
'교수님(코치님, 작가님 등등으로 자유롭게 불린다.)이 주신 꿈이라 한톨도 남김없이 귀하게 먹는다'고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요즘 나는 벌레먹어 골라낸 밤,
다 보내고도 또 늦가을 바람에 떨어진 밤들을 모아
밤을 삶고 까고 밤쨈과 밤샐러드를 만든다.
매일 아침, 점심의 글쓰는 사이사이 놀이는 밤줍는 놀이였고
매일 저녁, 일과가 끝난 밤놀이는 밤까고 삶고 만드는 놀이였다.
삶은 밤은 속을 모아 냉동실에 얼려둔다.
미국과 독일에 있는 아들딸이 오면 그 때 꺼내어 쨈을 만들어 줄 것이고
겨울이 되면 페치카에 고구마와 함께 구워 먹을 요량이다.
밤쨈은 보기에 된장처럼 보인다.
보이는 게 비슷하다고 속이 비슷한 건 아니다.
겉이 아니라 속이다.
밤쨈 속에는 나의
하나의 오름,
하나의 걸음,
하나의 주움,
하나의 사유,
하나의 정성이 모두 담겨 있다.
벌써 며칠째,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나의 아침은 밤잼, 밤샐러드이며
나의 간식은 밤라떼다.
밤을 받은 분들도
밤까는 재미와
아이들에게 밤라떼를 먹이는 행복과
밤쨈을 만들어 먹는 맛에 즐거워한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연의 무한한 선물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나와 다람쥐, 그 옆에 늘 슬그머니 나타났다 사라진 뱀까지.
그리고 나와 사람들...
이 모두는
하나로 행복을 공유하니
모두가...
하나다...
이제 시골에 와 처음 맞는
첫가을의 밤놀이,
첫가을밤의 놀이는 끝났다.
갑자기 새벽과 저녁이 추워졌다.
해가 더 짧아졌고.
며칠전 나는
마당에 그늘을 만드는 나무를 자르고 하늘길을 열어 해를 더 들였다.
자른 나무는 잎은 리어커에 실어 숲에 버리고 쓸만한 가지들은 마당에 옮겨 장작을 만든다.
겨우내 사용할 장작은 많을수록 좋다.
지천에 나무들이지만 함부로 베지는 않는다.
차량통행에 불편이 있다거나 집을 그늘지게 하는 가지들은 잘라주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다.
자!
밤놀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장작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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