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에 대하여
삶은 문제의 연속이라는데, 난 그런 삶은 원하지 않잖아!
그런데
도대체 내가 문제를 만들었나?
아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것도 아니다.
나도 너도 아닌데
모든 인간이 문제없는 인생을 원하는데
나 역시 내 삶에 문제를 만들려는 의도가 0.1도 없는데
왜 삶이 문제의 연속이냐고?
내게 문제를 던지는 그 ‘누군가’를
나는 ‘신’이라 부르겠다!
뭔가 의도를 가지고 날 골탕먹이고 있으니
난 신에게 맞짱떠서 내게 올 문제를 원천봉쇄시키련다!
나에게 낼 숙제로 늘 바쁜 신에게 더 어려운 숙제없나? 소리쳐 보련다.
나는 문제에 함몰되지 않는다.
문제에 내 정신이 잡히는 순간, 문제는 더 몸집을 키운다.
내 능력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내 바닥만 드러날 뿐이다.
문제는 그 자체가 지닌 '해결'의 힘을 스스로 이용하고 있음을
일단 믿고!
신이 내준 문제!
끝까지 풀어내고야 말 것이니 신과 경쟁하는 오만을 가지련다.
가만...
그런데
혹시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나?
내가 뭔가를 놓친 것이 있나?
문제는 공부가 끝나고 테스트할 때 받는 것인데
평소 공부가 부족하면 문제를 풀지 못하잖아.
혹시...
신은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던졌을 뿐인데
그걸 이제서야 알다니!!!
문제가 문제인 이유는 내가 문제보다 작기 때문인데...
닥친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평소에 해내야 할 숙제를 게을리했기 때문인데...
숙제를 내주기 위해선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어느 자리로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해야만
나에게 제대로 된 숙제들을 내주실텐데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신에게
나보다 더 나를 탐구하는 신에게
나보다 더 나를 크게 여기는 신에게
나보다 더 나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는 신에게
일단, 사과와 감사부터 해야 그게 도리가 아닌가?
그리고 감사에 대한 나의 보답은 제대로 숙제를 해내는 것뿐.
모르면 깨져가며, 아는 건 생색내며 그리 하면 되지 않을까?
이 숙제를 풀고 나면 내가 무엇을 알게 되는지.
누가 출제했는지에 따라 문제의 격과 질은 분명 다르다.
허접한 이가 출제한 숙제라면 풀어낼 필요조차 없지만
제대로 날 키우려는 이가 출제한 숙제라면 이건 빼박이다.
무엇을 위해?
나와 내 삶을 위해서지!
조금씩 숙제에 초점을 맞춰가면
문제보다 내가 더 커져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위기를 느낄 때가 종종 있긴 하다. 하지만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까를 고민하기보다 '고민하고 걱정해봤자 어쩔 수 없다. 숙제나 하자!'며 '문제'가 아닌 '나'에게 더 몰두해 온 덕에 '위기'는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알고 사라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문제'는 일시성, 일차원성, 유한성
'숙제'는 연속성, 다차원성, 무한성.
숙제를 지속하는 것이 앞으로 올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분명 효율적이다.
이쯤 알게 되니 점점 그의 의도에 고개가 숙여지고...
이내 나를 얼마나 크게 쓰려 하시는지
숙제는 점점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지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숙제에 집중할 수 있게끔
내 신경을 가져다 쓰려는 방해물들을 알아서 거둬주시는 배려!!!
얘들도 알아서 잘 크고
나도 별탈없이 건강하고
내 인생에 우려로 남을 이들은 알아서 떠나가고
곁을 내주고 싶은 이들이 감사히 다가오고
앞으로 넘어져도 코는 무사한...
그래서 확신을 가져 보련다.
오로지 내 정신이 ‘내가 가야 할 방향’에 서 있게 해주는
그것뿐.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된 나의 자리에서
세상에 잘 쓰이는 나로 나를 연마시키는
그것뿐.
예고없이 나를 간파하는 날카로운 숙제를 만드느라
나보다 더 나를 위해 고생하는 신에게
백만번 절을 올려도 모자라다는 걸 시간이 알려주며
나는 점점 더 깊이 감사를 느낀다.
숙제를 풀고 다음 숙제를 기다리는 것.
기다리다 심심하면 청소나 빨래로 소일거리하고
그래도 심심하면 괜시리 서랍장뒤져 다시 정리하고
혹여 때가 됐는데 숙제가 늦어지는 날은
신이 게으르거나
나를 과소평가했거나
내게 잠깐의 여유를 주는 것이니
그저 기다리면 그만이다.
내 숙제가 아니라고 따질 재간도,
어렵니 마니 칭얼댈 애교도,
지금이 때가 아니라고 미룰 용기도 없으니
그냥 그렇게
숙제를 받으면 언제 어디서든 풀 수 있는 자세로
내 정신과 신체가 궤도에서 이탈되지 않게끔 자리를 지키면 그만이다.
너무 정확한 때에 정확한 내용으로 정확한 강도의 숙제를 주실 것을
이제는 믿기에
그냥 감사히 받아들고 숙제에만 전념하면 그만이다.
신은 숙제만 덜렁 던져놓고
그 다음 숙제를 만드느라 너무나 바빠서인지
내가 풀어낼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서인지
내가 간파하든 못하든 너무 관대해서인지
아무튼 나에겐 무조건 유리하게 판이 돌아간다.
숙제제출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나에게 맡긴다.
지금 숙제를 끝내야 다음 숙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숙제 풀이에 꼭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던져 주신다.
잊어버렸는지 너무 바빠 챙기지 못하셨는지
아무튼 숙제와 숙제를 풀어낼 팁까지 함께 던지신다.
사람과 자연과 책.
모든 것을 다 던져주니 못 풀면 무조건 내 탓이라는 것.
좀 난해하게 꼬아 놓았지만 모든 숙제는 모두 풀어낼 수 있다는 의미.
신은 너무나 치밀하고 정확하고 냉정하고 또 가혹하다.
자신이 내준 숙제를 풀어내면 내 삶의 엉킨 곳이 풀어질 것을
어찌 이리 정확하게 예측하셨을까?
‘다음 숙제’는 그 ‘다음 문제’를 풀기 위한 숙제로.
또 그 다음은 그 다음으로.
치밀한 계산으로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숙제를 던지고
그 문제 다음엔 또 치밀한 계산으로 업그레이드된 숙제를.
더 놀라운 계산은
숙제를 어느 단계까지만 잘 해내면
삶의 문제가 저절로 풀어지는 자동시스템까지 고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지무지 냉정하게도,
지금 숙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다음 숙제는 뻔하다.
과거에 풀었던 숙제를 다시 던져 주신다.
한 번도 그냥 진도가 나가는 법이 없다.
꼭 지금 숙제를 제대로 풀어내야
업그레이드된, 다음 단계의 숙제를 알려주신다.
가끔 다음 숙제가 오지 않아 기다릴 땐 내심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내가 숙제를 잘못했나?
모자란가?
엉뚱한가?
너무 미루나?
여하튼
어김없이 가혹한 경고를 주신다.
자신이 바쁘시니
세상 어떤 곳, 어느 시점, 누군가, 무언가로부터 내게 문제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경고구나.
준비구나.
배움이구나....
내 숙제가 쌓이고 쌓여 다 풀어내지 못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내가 못 푼 숙제를 양도 내지 상속시킨다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가혹해서 나는 혹여나
나보다 귀한 자식에게 상속될까 두렵기도 하다.
다행히 나는 신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왔기에
그가 내준 숙제, 내가 해내야 할 타이밍, 그리고 때때로
날 정신차리게 만드는 ‘문제’라는 경고까지
이제는 잘 알아채고 있다.
그가 내준 숙제로 인해 나는 나를 더 키우게 되고
당연히 커진 만큼 삶의 문제도 더 커지겠지만
나는 신에게 맞짱뜨며 문제보다 내가 더 커지기 위해 매일매일의 숙제를 어김없이 해낸다.
맞짱뜨는 나를 오히려
이쁘게 받아 주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무언가를 향해봤자
딱 그만큼, 일시적인 한도 안에서만 쾌락을 느낄 뿐인데
신과 맞짱뜨며 문제보다 내가 더 커지려는 경쟁은
이 세상에 경쟁할 대상이 모두 없어지는,
단지 어제의 나와만 경쟁하는, 오묘한 신비로 나의 삶에 흡수되었다.
신이 내게 지속적으로 숙제를 내주는 의도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아니, 이제라도 알아냈다!
내 인생을 살겠다는데 왜 남의 인생과 경쟁한단 말인가?
도대체 경쟁할 대상이 누구인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신이 내게만 유일하게 내준 숙제를 받아들고
오늘도 난 버거워 허덕이지만
다음 숙제가 무엇인지에 몹시 설레면서
나를 세상에 내놓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숙제의 난이도를 높이시며
나를 키워내시는 그 분을 나는 순종하며 따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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