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계획으로 대립할 때 “아이가 있어야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거야!”라는 아내의 말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도 있는 거라며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의 말이 맞는 거 같다.
하늘에 돈을 뿌리며 부산과 인천을 열심히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하다 2년 만에 우리 부부는 결혼에 골인하였다. 결혼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장의 한 복판을 누비는 것과도 같았다. 결혼 당시 아내의 나이 24살 어느 아버지가 금쪽같은 딸을 시커먼 사내놈에게 내어주겠는가? 게다가 대한민국 끝과 끝을 오가며 주말부부를 해야 하는데 더더욱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장인어른의 반대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의 실랑이 끝에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선택해. 나야? 아버님이야?”아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너다.” 아내는 강단 있는 멋진 여자였다. 아내는 바로 처갓집에 선전 포고했고, 처갓집은 뒤집어졌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버지에게 반항 한번 없이 고분고분 말 잘 듣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번듯한 직장을 얻은 업고 다녀도 시원찮을 이쁘고 귀한 딸이 연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니 장인어른의 마음은 더더욱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울며 겨자 먹기로 굳게 빗장 걸렸던 처갓집의 문은 허무하게 열리게 되었다. 결혼 승낙을 얻는 과정만큼 결혼식 과정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우리 집과 나와 아내는 조촐한 스몰웨딩을 생각했지만, 장인어른은 이쁜 딸이 그렇게 시집가는 게 싫으셨나 보다. 제대로 웨딩드레스도 입히고, 남들 하는 건 다 하게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결혼은 부모 잔치 장례식은 자식 잔치라는 말처럼 결국 아버님에게 모든 것을 맞춰 드리고 예물이며 예단이며 형식적인 결혼식을 넘어 피로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나도 딸 가진 부모가 되어 보니 하나라도 더 해주고픈 부모 마음이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그냥 당신 딸을 나에게 주는 게 못마땅하여 방해하시는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어려운 결혼 과정을 이겨 내고 나니 우리는 진정한 부부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친한 후배에게 우리 부부가 반대를 이기고 힘들게 결혼한 이야기를 해주며 “이런 게 연애와 결혼의 차이야. 연애는 둘만 보면 되지만, 결혼은 서로의 집안에 대한 입장까지 고려해주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합의를 찾아서 이해하는 거야.”라고 거드름 피울 정도의 경험은 되었다.
그런데 사실 아이가 나오기 전 신혼생활은 미혼일 때와 생활 면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혼 6개월 만에 장거리 주말부부를 졸업하고 합가 하게 되었다. 신혼 초기 6개월 정도 각자의 생활습관에 적응하지 못해 자잘하게 자주 싸우긴 했지만, 또 금방 적응하고 일상이 흘러갔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개 산책하고, 운동하고, 집안일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우리만의 집을 우리만의 힘으로 샀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올 대출로 화끈하게 지른 은행의 집이지만, 3년 정도 부산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나만의 원룸에서 자유를 만끽했다면, 우리가 우리만의 힘으로 확보한 우리만의 공간은 그 어떤 원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계약하는 과정에서 처음 겪는 억대 금액의 거래에 일주일 정도를 체한 상태로 보내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입주 후 그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정도로 우리만의 공간은 나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경제적으로도 기대가 컸지만, 1+1=2가 되지 않았다. 하늘에 뿌리던 장거리 이동 비용과 각자의 관리비 등은 고스란히 대출금 갚는 돈으로 나가게 되었고, 이것저것 고정비를 떼고 나면 연애 때보다 더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그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진짜 변화는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온 뒤부터 시작이었다. 결혼 3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그것도 2명이나, 이제 우리 집의 구성원은 4명과 2마리가 되었다. 아이가 생김으로써 우리 집은 이제 가구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최소 단위의 조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신혼 초반에 서로의 생활 습관에 대한 불만은 ‘눈 감기’라는 방법으로 적응했다. 그런데 이제 부모가 되었으니 눈 감아서는 안 된다. 눈 똑바로 뜨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직시해야 한다. 부모는 각자가 가정이라는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리더이다. 위대한 리더는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며 성장해 나아가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정은 솔선수범하는 가장을 필두로 가정의 선순환이 도는 것이었다. 가장은 솔선수범하여 가족원에게 모범을 보이고, 가족원은 솔선수범하는 가장을 본받아 더 믿어주고 따라주면, 가장은 잘 따라주는 가족원들이 고마워 더 힘을 내는 구조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톱니바퀴도 가장 힘을 내는 큰 톱니바퀴를 필두로 맞물려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돌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집의 두 번째 톱니바퀴가 자꾸 튀는 것이었다. 아이 낳기 전 호기롭게 가장이라는 직책과 양육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나에게 일임했던 아내는 실상 육아가 시작되니 사사건건 나에게 밭다리를 걸었다. 당연히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나에게는 박 터지게 싸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책임과 권한을 일임받았음에도 항상 육아든 가정일이든 어떤 일이든 사전에 아내와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 논의 후 합의를 했으면 전적으로 한 명이 주도하고 전적으로 한 명이 보조해줘야 한다. 그게 내 방식이다. 나는 아내의 보조가 꼭 필요하기에 항상 아내와 어떤 일이든 논의를 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전적인 보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항상 밭다리가 걸렸다. 나는 생산적인 싸움을 좋아한다. 정반합은 항상 옳다. 하지만 이건 생산적인 싸움이 아니다. 이건 내 에너지를 애먼 곳에 퍼부으며 소비하고 있는 거다. 소모전에 지친 나는 ‘안 되겠다. 근원부터 찾아들어가야겠다.’ 생각하고 아내를 앉히고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이 뭐야?”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돈 벌어주는 사람.” 아내의 대답에 기가 찼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쓴 채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는 아내의 역할은 뭔데?” 아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집안일하는 사람.”
‘연애부터 따져서 연을 맺게 된 지 6년 차인데도 이 정도로 인식의 차이가 다르구나!’하고 새삼 놀랐다. 그날 나는 가장은 결정권자이자 책임지는 사람, 아내는 안주인으로서 주도적으로 가정을 경영하는 경영자에 빗대어 설명을 하며, 내가 생각한 가정의 바람직한 선순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다행히 아내는 내가 뭘 말하는지 이해했고, 내가 뭘 필요해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았다.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나만의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이로써 우리 가정이라는 조직의 톱니바퀴는 튀는 것 하나 없이 잘 돌리고 잘 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