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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약방 Oct 24. 2022

복잡한 마음, 복잡한 진실

-공황장애에 최정화의 「잘못 찾아오다」을 처방합니다

  1. 이상하고 아름다운

  B와는 가끔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가끔은 1년이기도 하고 6개월이기도 하다. 나와 B는 5~6년 전에 예술워크숍의 담당자와 참가자로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연기로 진로를 결정한 B는 가끔 연극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가끔 취업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B의 20대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냉소적인 인상을 주었다. 안 될 거야, 라든가 별 거 없다, 라는 식으로 쿨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나 간절함이 있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럴까? 예술지망생이라는 오래된 직업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제멋대로 사람을 휘저어 놓는 직업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런 보편적인 모습과 달리 B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매우 막무가내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만취상태에서도 내가 ‘선생’이라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한순간에 막말을 날려버리는 후련함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에게서 제멋대로이고 잘난 척하거나 불행한 척하며 폭주하는 건 익히 봐왔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 허물어지는 모습은 좀 새로웠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B는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기억하는 B의 불일치는 이런 모습이다. 

  최근 2~3년 동안 B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연기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터져 일이 꼬여버렸다. 주식투자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고, 20대를 같이 보낸 남친과도 결별했다. 몇 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의 근무조건과 업무에 만족하고 있고, 집으로부터 독립해 마음 맞는 언니의 셰어하우스에 함께 살고 있다. 안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좋은 일들도 없지 않았다. 이제 막 30대가 된 B는 좀 더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일과 연기, 돈과 예술, 연애와 친구관계 등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이 많고 예민해요. 충동적이고 지루한 걸 못 참아요. 그게 꼭 나쁜 걸까 싶기도 해요. 그런 모습이 ‘나’이기도 하니까요.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힘들죠. 제가 관계에 서툴다는 생각도 들고요. 경미한 공황장애가 있어요. 약을 먹으면 바로 좋아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데, 공황상태가 올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저한테 불안감이 있나 봐요.”

  내가 B에게 20대를 정말 많은 경험을 하며 보냈다고 칭찬을 해줬더니 B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걸 한 건 맞는데, 경험에 비해 배운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자꾸 반복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B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는 자기 분석과 자기 성찰이 돼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이제 막 30대가 된 B가 그걸 알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러나 2주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이전과 달리 더 불안정해 보였고, 회사 근처 카페서 만난 거라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B는 자주 회사 동료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되지 못했다. 나는 B에 대해서 판단이 서지 않았다. B의 문제는 심각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B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캐릭터들을 살펴봤다. <피아니스트>(2001년)의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이터널 선샤인>(2004년)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년)의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아가씨>(2016년)의 아가씨(김민희). 레전드가 된 영화와 배우들이라 뭐라 덧붙이는 게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이상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배역들이었다. 티파니의 대사처럼 “평온을 찾으려 하는 망가진 여자”들의 분투는 아름다웠고, 그녀들이 평온하지 못한 이유는 그녀들에게 있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예민함과 똑똑함인데, 예민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자주 ‘미친 여자’가 되어 그들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한다. 뭐가 문제인가? 예민하고 똑똑하고 순응적이지 않은 그녀들인가? 둔감하고 규격화되고 관대하지 못한 세계인가?      



  2. 복잡한 마음복잡한 진실     

  

트럭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여자가 어째서 나와 같은 집에 이사를 오려고 했던 것인지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돌아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 여자의 집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여자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면 기억나지 않는 아주 먼 과거나 혹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에, 내가 그녀에게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찾아오다」,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문학동네, 62쪽)     


  B가 좋아한다는 영화를 보다 최정화의 ‘이상한’ 소설들이 떠올랐다. 최정화의 소설은 이상하다.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온 여자에게 여주인은 자기 가정을 빼앗으러 온 듯한 불안감을 느끼는데, 면접을 마친 그녀는 자기 구두 대신 여주인의 신발을 신고 가버린다(「구두」). 재개발이 시작된 도시의 붕괴된 건물 사진을 기록영상으로 촬영하던 한 여성은 작업하는 내내 마음이 찜찜한데, 정신 사납게 헝클어진 집기들을 원래대로 정리한 후에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촬영을 마친다(「모든 것을 제 자리에」). 

  최정화의 인물들은 어떤 상실감이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데, 「잘못 찾아오다」도 그런 계열에 속한다. 「잘못 찾아오다」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가 겹쳐 있다. 새로 언덕 위 빌라로 이사 온 ‘나’에게 이상한 일이 반복된다. 이삿날에는 내 집의 또 다른 입주자를 자처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 후로도 누군가 집 현관 비번을 누르다 사리지기도 하고, 집 앞에서 꼬마가 제 집인 양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밤중에 찾아와 잘못했다고 사과하며 나오라고 조용히 말하기도 한다. 이사 간 전 주인을 찾아온 사람들 같은데, 그들에게 “그 사람 여기 안 살아요. 이사 갔어요.”라고 말하는 게 거짓말 같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지만 젊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하면 불안감이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는 친구 재희와의 재회다. 재희는 공인중개사 학원에서 만난 사이인데 한 친구의 지갑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으며 모임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훔쳤다는 사실이 명확한 순간에도 재희는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억울해하며 떠났다. 아주 오랜만에 나타난 재희는 ‘나’의 공인중개사무실에 찾아와 집을 구해달라는 부탁만 하고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재희가 진짜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집을 잘못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 재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나’와 재희는 도자기 공예점에서 고객과 직원으로 만나고 무슨 이유에선지 ‘나’의 쇼핑백에 계산하지 않은 물건이 들어있어 도둑으로 몰리는 난처한 일을 당한다. 

  최정화는 비슷하게 변주되는 두 에피소드를 명확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재희는 진짜 지갑도둑일 수도 있고 누명을 썼을 수도 있다. ‘나’는 진짜 도둑일 수도 있고 직원인 재희의 계략에 의해 누명을 썼을 수도 있다. 이런 혼란은 ‘나’의 집에 대한 의심도 증폭시킨다. ‘나’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집을 얻었을 수도 있고, 잘못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윤리적 측면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묵묵히 걷기만 하고 청년은 따라오는데 걷다가 귀를 가만히 세워보니 청년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두어 걸움 뒤편에서 열심히 따라오는 청년은 분명히 보이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고 내 발소리만 언덕길을 울린다. 문득 그가 말하는 제집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가 그렇게 선언한 것도 아닌데 무작정 그 집이 내 집이라고. 네 집이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앞서 걸을 뿐이다.

  간판에는 슈퍼라고 써 붙이고 안쪽에서는 옷가지들을 잔뜩 쌓아놓고 포장하는 허름한 점포를 지나 빌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구십년대식으로 건축한 붉은 벽돌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목 양편에 주차한 차 밑마다 고양이들이 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청년과 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마치 둘 중 그 집에 들어가는 게 누군지 지켜볼 일이라는 듯 무심하나 반짝이는 두 눈이 그늘 밑에서 조용히 빛난다.  (「잘못 찾아오다」, 같은 책, 83쪽)     


  뭐가 진실이고,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최정화는 의도적으로 혼란을 야기한다. 뭐가 진실이고,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비꼬는 듯 혼란을 그대로 방치한다. 혹은 뭐가 진실이고,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확하게 단죄해왔던 세계야말로 문제라고 고집스럽게 ‘항의’하는 것도 같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서있는 입장에 따라 해석은 분분하고 이를 수렴하는 감정도 복잡하다.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분열증 환자의 진술처럼 의심받거나 신뢰를 잃는다. 그래서 최정화의 소설은 묘하게도 스릴러물 같은 긴장과 기괴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기괴함이 매끈한 이야기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설득이 되는 순간, 독자인 우리는 매끈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분열증을 인정할 것인가, 세계는 온전하다는 망상에 빠질 것인가. 우리가 매혹되는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대개 전자를 선택한다. ‘미친 여자’ 취급 받는 예민하고 똑똑한 여자들도 같은 선택을 한다.      

 


 3. B의 얼굴들

  늘 그렇듯이 나는 바빠서 문학처방전을 많이 미루고 있었다.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짬짬이 B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닥쳐오는 일을 해치우느라 B에 대한 걱정은 뒤로 밀려났다. 그런 피곤한 날들 가운데 하루, B는 SNS로 “쌤 어쩌다보니 저도 질병에 대해 썼네요!”라며 자신의 플랫폼에 올린 글의 링크를 보내왔다. 맞다. B는 연기를 전공하지만 글도 잘 쓰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적 호기심인지 지적 허영인지 모르지만 책읽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B는 늘 뭘 배우러 다녔는데, 그건 연기뿐이 아니라 연출일 때도 있었고 무대미술일 때도 있었다. 

  B의 글을 읽어보니 따로 문학처방전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미 혼자 잘 진단하고 적절히 처방을 내렸다. B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쓴 대로 “이제는 내가 이전보다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자기 글의 구속력을 느끼며 생활을 단도리 할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 지속되다 흐지부지 돼도 상관없다. 그땐 또 다른 다짐과 선언으로 자신을 단도리 해가면 된다. B는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사람이고 그때그때마다 자신의 생각과 결단을 수정해갈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 

  B의 플랫폼을 쓰윽 훑어보고 나는 새삼 놀랐다. B는 꽤 많은 글을 써서 저장하고 있었다. B가 다니던 워크숍이나 연기클래스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무엇이 고민인지 B는 의지적으로 글로 남기고 있었다. 나에게 ‘연기’라는 분야가 생소한 까닭에 B의 글들은 신선했다. 일상생활에서 보던 B보다 무대 위의 B는 훨씬 단련되어 있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환상이 만들어진다. ‘B! 멋진데!’라든가 ‘B! 제법 연기를 하는구나!’라는 감탄을 대놓고 하지는 못했지만, 배우 B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B의 글들은 무대 위의 B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새로웠다. SNS로 안부를 주고받을 때나, 술자리에서 주정을 할 때에는 들을 수 없는 B의 생각들을 보다 정리된 문장으로 읽을 수 있었다. B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사려 깊었다. 쉽게 일반화하거나 통념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유보하는 듯한 태도가 읽혀졌다.  

    

‘내가 실은, 사실은 아닌 척 하지만!!! 마음 속 깊이 무언가에 깊이 관여하고 싶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분열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게 맞고, 이걸 쉽게 ‘사실은/알고 보면’이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내리고 싶지 않다. 또 내가 연기를 하고 싶은 어떤 근본적인 이유도 실은 연기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생각하는 어떤 분열적인 상태이고 그것을 ‘알고 하기 때문’인 것 같으니 말이다.  

 (B의 브런치에서)     


  물론, 글로 표현된 B가 B의 모든 것은 아니다. 현실의 B는 위악과 가식이고 글의 B만이 진실인 것도 아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B도 가짜 B가 아니다. B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면 B는 그 여러 얼굴들로 스스로 혼란을 느낄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숱하게 분열된 자신을 만나고 확인하지만 차마 그 분열을 드러나지 못한다면, B와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봉합하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분열과 혼란을 드러내고 끝까지 가볼까 탐구해보는 사람들이다. 이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특혜일 것이다. B가 연기에 매혹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도 ‘처방전’을 내려 본다면, B가 글쓰기에 연기만큼 애정을 더해봤으면 좋겠다. 플랫폼에 기록을 남기는 것을 넘어 출판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출판을 하려면 아마도 지금 쓴 글들을 대폭 수정해야 할 것이다. 목차도 새로 잡아봐야 하고, 새롭게 써야 할 내용도 나올 것이다. 그 과정에서 B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기와 삶을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감정표현이 서툰 것 같아요. 좋아도 싫어도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요. 그냥 느끼는 대로 그만큼만 표현해보려 노력해야겠어요.”     

  두 번째 만났을 때, B는 별 기대 없이 자신이 생각한 해결책을 말해줬다. 허랑방탕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애쓰며 살아가는 B야, 뭐든 좋다. 다만 글쓰기를 연기만큼 너의 장르라 생각하고 시간을 더 들여서 써보자. 연기와 글쓰기로 분열하는 B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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