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환상 // 야생말
먼 지평선에서 붉은 태양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빛나는 갈기의 야생말은 지친 몸을 일으켜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초원을 바라보았다.
우기(雨期) 동안 푸른 주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았던 초원은
이제 누런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다.
여명 속에서 하얀 갈비뼈가 드러난
동물들의 시신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부패한 시신에서 풍겨오는 악취,
바람은 죽음의 향기를 품고 다가왔다.
그는 이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까지 이런 가뭄은 처음이었다.
비가 내렸던 날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어
털과 갈기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었다.
눈곱이 달라붙은 눈을 껌벅이고
지평선을 물들인 핏빛 아침노을을 바라보았다.
동트는 대지 위에 움직이는 생명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초원 위의 모든 생명이 죽어 가고 있었다.
순간, 엄습하는 절망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다리를 휘청거렸다.
안 돼, 힘을 내자.
모두가 나만을 의지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생존 의지를 빼앗아 버리는 치명적 원인
그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것을.
그것은 갈증이 아니라 포기라는 것을.
그는 이 초원에 사는 야생말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그들을 이끌고 갈 마지막 희망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물을 찾아야 했다.
어젯밤 별빛이 젖은 작은 늪에서
겨우 입술만을 축인 그들은
다시 새로운 물을 찾아가야 했다.
그는 지친 다리에 힘을 싣고
다분히 허세가 깃든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완전히 중천에 떠올랐다.
태양은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초원의 그 어디에도 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도 가끔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행 중의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저 멀리 앞을 바라보았다.
어른거리는 더운 열기 속에
푸른 나무숲이 보였다.
숲이다.
그는 일행을 향해 힘차게 앞발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들의 생명을 구해 줄 물을 찾았다.
저 푸른 나무숲에 가면
갈증으로 메마른 목을 축여줄 물이 있을 것이다.
뜨거운 태양광선에 탄 등허리를 식혀줄
푸른 물이 넘실대는 늪이 있을 것이다.
숲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저기 갈증과 굶주림에 쓰러져 죽은
동물들의 시신은 애써 외면하고 지나쳤다.
드디어 숲에 도달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늪을 둘러보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마른 적 없이
푸른 물로 출렁거리던 늪이었다.
그러나 늪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채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늪가에 무성하던 풀들도 바싹 메말라 있었다.
털썩,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했다.
그가 무너지면, 일행도 도미노처럼 쓰러질 것이기에
그는 안간힘을 다하여 버텼다.
함께 온 일행을 하나하나 점호하듯 살펴보았다.
처음 백 명이 넘었던 일행은 이제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일행 사이에 있었던
어린아이 하나도 대열에서 낙오되고 없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지나온 초원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 두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야위어 가느다란 다리를 절룩거리며
필사적인 몸짓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탄저병!
몹쓸 죽음의 병!
그는 알고 있었다.
탄저병에 걸린 야생말은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감추고자,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매서운 눈초리,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낮은 하늘가를 맴돌고 있었다.
탄저병에 걸린 저 어린아이는
곧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저 불온한 검은 새는 수직 낙하하여
제일 먼저 저 아이의 눈부터 쪼기 시작하리라.
초원의 잔인한 하늘청소부!
그는 눈에 힘을 주고 검은 독수리를 노려보았다.
저 아이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다.
어차피 일행과 합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메마른 늪가 먼지 그늘에 서서
아이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아이가 다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틀비틀 채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눈부신 태양광선 속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자리에서 붉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제 저 아이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아이가 무릎이라도 한번 세워 주기를
제발 고개라도 한번 들어
마지막 그 여린 눈빛만이라도
서로 마주칠 수 있기를.
아이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여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래, 너의 그 여린 눈빛이라도 한번 보내 주렴.
그때 뒤편 모래언덕 위에서
어른거리는 열기를 후광처럼 두르고
사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부신 태양광선의 흑점을 뚫고
맹렬한 기세로 사자가 달려왔다.
은빛 갈기 속에 번쩍이는 이빨이
아이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짧게 부르짖는 날카로운 비명!
비명이 들린 곳에서
붉은 모래 먼지가 잠시 피어올랐다가
초원은 다시 한낮의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
눈물은 보이지 말자.
눈물은 가슴속으로 흘러내리자.
물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물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는 지친 발목에 힘을 주고
다시 뜨거운 초원의 열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가슴에는 슬픔보다는
아직도 그를 의지하며 따라오는
남은 일행의 생존에 대한
안타까운 의지가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눈물에 잠긴 눈을 내리깔았다.
발아래에는 방금까지 곁에 서 있던
마지막 일행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검은 구름이 대지를 덮었다.
찰나의 섬광, 지평선을 가르고 천둥이 울렸다.
또 하나의 섬광, 하늘을 갈랐다.
더 큰 뇌성, 지축을 흔들었다.
우두둑, 굵은 소나기가
메마른 초원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이 비가 조금만 더 일찍 내렸더라면,
모두가 쓰러지진 않았을 터.
그러나 이제 그는 혼자였다.
고개를 젖히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벌리기만 해도 빗물이 입 안에 고여
그는 이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입술을 미소로 닫고 눈을 감았다.
참선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스로 호흡을 멈추었다.
숨을 쉬지 않는데도 가슴은 더없이 시원했다.
귀에, 그가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아니,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 탯줄을 타고 울리던
노랫소리가 들렸다.
하늘이시여!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이 무한한 공기를 주신 것은
당신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땅이시여!
우리가 마실 물과 먹을 양식과 뛰놀 수 있는
이 넓은 초원을 주신 것은
당신의 풍요로운 축복입니다.
종족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시고
그대들이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정성은
우리들의 소중한 나눔입니다.
하늘과 땅과 종족들의 사랑 속에 태어난
내 생명이여!
이제 원래 그대의 본성이 존재했던
그 시원(始原)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내 생명이 태어나 숨 쉬고 자랐던
이 초원 위의 생(生)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돌아가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웠던 나의 생의 얘기는
이 대지의 가슴에 소중히 기억될 것입니다.
노랫소리가 멈췄다.
빗줄기는 여전히 그의 등줄기 위에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호흡이 멎었지만,
그 몸은 비가 내리는 초원 위에
석상처럼 굳어진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초원에는 다시 빛이 내리고
그 빛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여
끊임없는 순환의 이음줄을 엮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종족이 나타나
생의 환희를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