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가려도 감출 수 없는 찬란한 노을이 마지막 숨을 가파르게 내뱉고, 갓 나온 어두움이 농밀하고도 긴 호흡을 차분하고도 두텁게 내뱉는 그 순간! 가로등에 깜빡이는 노란 불빛이 비추이면 온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고 아름답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다. 그는 그 순간을 정말 사랑한다. 해 질 녘 노을, 구름, 밤하늘의 별이 그의 사진첩에는 가득하다.
그는 떠오르는 태양보다 지는 해와 노을, 그리고 어둠이 깊이 내려앉은 후의 투명한 하늘에 비추인 별을 무척 사랑한다. 해가 맑고 흰 구름이 몽실몽실 뜬 날, 건조하면서도 풀냄새 가득한 바람이 싱그럽게 불어오는 날이면 그는 밤을 온종일 기다린다.
성탄절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도 그만큼 설레지는 못 할 것이다. 별을 볼 수 있는 날이 면 언제나 설렘과 기대가 그의 가슴을 가득 메운다. 그 많은 밤들이 그에겐 각각의 새로운 기다림만 같아 보인다. 달과 별, 구름은 그 마음을 알까? 깊은 밤 모두가 잠든 이 시간. 이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달, 별, 구름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매일 변함없는 설렘으로 그들을 기다릴 누군가가 있으니 말이다.
별들이 하나 둘 뜨고, 달이 얼굴을 내밀면 그의 빛과 달빛이 하나로 섞인다. 그리 좋을까? 달과 숨바꼭질을 하며 구름 사이에 숨어든 달을 망원경으로 간절하게 소환한다. 달빛에 눈이 멀 수도 있을 만큼 달이 밝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목성과 토성이 나와 상관없는 아주 딴 세상에 있어 볼 수 없는 별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몽글몽글 우윳빛 뽀얀 구름이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몽실몽실 떠다닌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달이 구름사이로 숨바꼭질을 한다(23.08)
밤이라는 것이, 어두움이라는 것이 정말 칠흑 같은 어둠과 캄캄함,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검정 크레파스로 칠한 도화지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지구가 잠시 태양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해가 없는 그 자리에 달과 별이 여전히 지구별을 아름답게 지켜준다는 것도 새삼 깨달는다. 동이 밝아오는 순간 마지막 샛별과 달이 푸르스름한 하늘을 지키다 태양이 나타나면 별들은 그들의 밤으로 간다. 태양도 목성도 달도 별이다. 같은 별인데 이들을 만날 수 있는 때도, 감정의 밀도와 온도도, 기다림의 느낌도 다르다. 기다림이 항상 설렐 수만은 없어서일까? 사는 날 동안 몇 번이나 뜨는 해를 보고 설레어봤을까? 몇 번이나 별을 보고 설레어봤을까? 몇 번이나 그렇게 달을 그리도 정성스럽게 바라보았을까?
그러고 보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나 많은 밤에 별을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새로운 설렘으로 그 별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함께 보는 그 별들에 마음, 생각이 온통 씻겨진다. 태양의 밤은 별들의 아침이었고, 별들의 밤은 태양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