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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아름 Sep 04. 2023

사랑보다 강한 무기는 없었습니다

미움 끝에 깨달은 진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종교인처럼 살아왔다. 내 모든 청춘을 다 바쳐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렇게 나 자신에게 엄격한 자를 들이대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때면 밤새도록 나를 쥐어뜯으며 몸서리치며 자학하다시피 살아온 나의 젊은 인생의 나날들이었다. 


비록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스물이 되고 나의 인생꿈을 설계할 때 나는 ‘세상의 한 중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만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이왕이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위해 인생을 미련 없이 쓰고 싶다는 마음을 키워나갔다. 어떻게 세상의 중심에 서고 어떻게 더불어 사랑하며 살지에 대해선 배워도 삶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니 이론과 공허함이 주를 이루었다. 


싸우는 것도 다투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학창 시절에도 선생님이 단체기합으로 매를 때릴지라면 내가 냉큼 달려가 다 내 잘못이라며 내가 대신 얻어맞고 험악한 분위기를 끝내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엄마는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때린 놈은 쭈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 쭉 뻗고 잔다. 조금 손해 본 듯 인생사는 게 좋아”

엄마의 말씀 때문인지 또는 나의 타고난 여린 성향 때문인지 언제나 손해 보는 쪽을, 상처주기보다 받는 쪽을 택하며 살아왔던 날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던 내가,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던 내가 지독히도 사람을 미워한 적이 있었다. 



나도 상처를 주고 싸워야만 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디를 가든 적응력도 빠르고 잘 어울려 지내는 사회적 지능이 비교적 우수한 나는 삶가운데 겪지 말아야 할 고통과 어려움을 최근 3년 동안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온전하지 않은 불의와 불합리한 업무처리로 불이익을 계속 겪어야만 했고, 심지어는 형사고소까지 당할 만큼 조직과 날 선 각의 끝에 섰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소위 털어낼 만한 죄몫’을 찾지 못해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을 생각해 보면 시간도 아깝고 그렇게밖에 해결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돌아갈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조차도 희미해질 때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조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어떻게 앞을 헤쳐가야 하는 것일까 고민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내왔던 지난 3년의 시간이다. 나는 조직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행정에 상식과 규정으로 대응하지만 윗분들은 옳고 그름보다 그들의 기준과 판단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에 괘씸해하는 것 같았다. 상대를 너무 몰랐던 나였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공직자로서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만한 수준의 아량과 행정능력을 가졌을 거라고 확신했던 내가 야속해졌다. 그들을 너무 몰랐다. 둘째는, 객관적이고 드라이한 업무처리보다는 어쩌면 정적인 방법으로 먼저 접근을 했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죄명은 괘씸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너무 단순한 일들까지 우리는 왜 돈과 시간을 쓰며 마음을 먼저 사야 하는 것일까 안타깝고 아리기도 한 대목이다. 


사회의 한 저명인사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조직을 경영하다 보면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른 것도 덮고 가야 하고, 옳은 것이 꼭 선은 아니에요. 부정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조직에 악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이 섞여사는 세상이니까 그래요”


그분의 말씀에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양심이 말하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보다도 ‘존재’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선도 악도 고통을 받지만 그래도 온전하게 사는 쪽이 늘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소신껏 사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고 정의롭게 사는 것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로 반대편이 씌우는 각종 프레임에 희생되어야 하니 말이다. 


뜬금없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분은 나의 고통도 고충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내게 주문한 것은 ‘용서와 사랑’이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봐요. 그리고 기도해요. 그들을 바닥까지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해 주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실 겁니다. 생각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져요. 반드시 그럴 겁니다”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지피고 있음을 느꼈다. 지난 3년 동안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겪으며 난 깨달았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그리고 남을 미워하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난 이미 지난해에 이들을 용서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움의 파편들이 유리조각이 되어 나를 여전히 자르고 상처 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사랑해야지’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비워지지 않는 마음은 소금이 되어 나의 지난 상처들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 


원수라도 얼굴을 마주하니……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며 온갖 올무를 놓고, 집요하게 괴롭혔던 이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먼저 다가가서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들을 경청하며 웃는 얼굴로 그의 눈을 계속 응시하며 공감해 주었다. 찬찬히 바라보니 그도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이며 아버지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겉은 멀쩡하고 목소리는 자상하기까지 하다. 그런 그는 왜 그토록 미움을 괴물이 되어 그를 삼키게 하기까지 키우며 그 괴물을 내게 보내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업무보고를 마친 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언제까지나 웃으며 진심으로 그를 대해주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었다. 그가 바라고 원하는 일들이 진심으로 잘되기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그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를 기도해야겠다고 말이다. 구름이 점찍듯 있는 하늘이라도 푸른 하늘은 언제나 마음을 트이게 하듯 오늘 내 마음이 그랬다. 이런 것이 사랑인 것이구나….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그리고 그런 마음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에  몸서리치고, 자아를 냉정하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제 조금은 인생을 move on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미움의 역을 지나 나는 다음역을 향해가는 기차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보다 더한 무기는 없었다

이제 남은 숙제는 다시 미움이 올라오지 않도록, 그리고 그 미움이 나를 좇아오지 않도록 나의 길을 즐겁게 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사랑의 주인 되신 신께 사랑을 간구하며 배우며 또 그들을 사랑하며 갈 것이다. 사랑이 미움보다 더 큰 무기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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