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6년차ㅣ대기업 영업 임원 이야기
저는 인천에 사는 60대 초반으로 6년 전에 퇴직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직장은 대한민국 10대 기업 중 하나로 제조와 유통에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었지요.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기획과 영업업무를 하다 상무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여도 저의 직장 말년 운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퇴직 전 마지막 해에 악연이 있는 3년 후배를 상사로 모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 지나치게 정치적인 데다가 쇼맨십만 강해서 평상시에도 저와 너무 안 맞았는데요, 그런 친구를 상사로 모시게 되다니 직장 내에서의 제 운도 다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상사가 된 후배와 일하며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전체 임원회의 때 후배가 대놓고 저를 질타하는 거였습니다. 본인이 제 상사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저와 조용히 얘기하고 해결해도 될 일을 크게 공론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직장 생활하면서 나 좋은 일만 할 수는 없겠지만 후배를 상사로 모시는 일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회사는 임원으로 퇴직하게 되면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는데요, 가장 큰 게 퇴임 후 2년간 주는 급여였습니다. 임원 시절에 받던 월급의 절반, 그러니까 부장 정도 되는 급여를 매달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 혜택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사로부터 퇴직 통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스스로 나간다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조건부 혜택이었다고나 할까요.
퇴직 후 재취업을 했을 때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비밀유지를 위한 입막음용인 셈이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끼리는 이 급여를 올가미라고 불렀습니다. 임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주는 게 아니라 퇴직 후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옭아매기 위해서 준다는 의미인 올가미. 안타까운 건 실제로 이 급여를 받은 사람 중에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게 될 테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상황 파악도 못하는 사람을 반길 회사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퇴직 통보를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요? 허탈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지요. 이후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서 더 견디기 힘들더군요. 하지만 회사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어 나가는 날도 더러 있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돌아오면 다시 혼자가 되고, 그렇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우울감과 상실감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무슨 일이든 해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보수가 적더라도 일자리를 구해 어떠한 활동이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힘들더군요. 대기업에서 관리만 해본 사람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솔직히 대기업 임원 출신 중에 특별한 기술 가진 사람, 거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몸 쓰는 일뿐이었습니다. 복잡한 머리를 비워내기엔 오히려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3D 업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회사에서도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한몫했습니다.
그렇게 모텔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조금만 더 가면 모텔촌이 있는데 마침 당*마켓에 구인정보가 떠서 이거다 싶었습니다. 제한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지원 자격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사람 만날 일이 없다는 게 큰 메리트로 느껴졌습니다. 바로 연락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갔더니 사장이 위아래로 저를 훑어보더군요.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은 있는지와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는지만 물었습니다.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모텔에서 청소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손님이 체크아웃하면 오후에 다른 손님이 체크인할 때까지 방을 청소하는 게 제가 할 일의 전부였습니다. 쓰레기 치우고, 침대 커버 교체하고. 욕실 청소하고 뭐,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 5시간 일했는데 급여는 한 시간에 1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하루에 청소했던 방이 보통 다섯 개에서 여덟 개 사이였으니까 방 하나로 치면 만원이 안 되는 셈이지요.
막상 해보니 모텔이 잠만 자는 곳이 아니더군요. 요즘에 젊은 친구들은 모텔을 잡아놓고 밤새워 놀더라고요. 술집에 가면 술값도 비싸고 오래 있는 것도 눈치 보이니 차라리 모텔을 잡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썼던 방을 만나면 정말 난감해집니다. 수십 병 술병은 기본이고 배달 주문했던 음식들로 방바닥이 아주 난리입니다. 국물이 이불이며 벽지에까지 튀어 뒤처리하기가 매우 골치 아파집니다. 그런 방은 여지없이 욕실도 지저분했는데요, 공중 화장실 저리 가라였습니다. 그렇게 더럽혀진 방을 만나면 하루가 완전히 꼬이게 되지요.
“삼촌, 312호랑 405호요” 사장은 저를 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장은 매일 아침 제가 출근하면 그날 제가 청소해야 하는 방 번호를 알려 주었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특별히 더러워진 방을 저에게 청소하라고 시킨 거더라고요. 사장도 객실 청소를 했는데 제가 오기 전에 손님이 나간 방들을 먼저 훑어보고 본인과 저의 역할을 나누었던 거였습니다. 돈 주는 사람 마음이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참, 바깥세상도 만만치 않더군요.
모텔청소 아르바이트는 총 3개월쯤 했습니다. 제가 먼저 그만둔다고 한 건 아니었고,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청소할 때 이전 손님 물건을 덜 치운 게 있었는데, 뒤에 들어온 손님이 그걸 보고 사장한테 크게 컴플레인을 걸었더라고요. 사장이 그걸 빌미로 제게 나가달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싶었는데, 굳이 따지고 드는 게 평상시 저에 대한 사장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삼촌, 손님 들어올 시간이에요. 빨리빨리 좀 해요” 제가 모텔에서 일하는 동안 사장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제가 좀 느리고 서툴긴 했습니다. 평상시에 청소를 해봤어야 말이지요. 저 같아도 저 같은 알바, 오래 데리고 있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잘한 일 같습니다. 그 일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 시절을 견뎌낼 힘이 없었을 테니까요.
다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에서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sUl6ASLOKi4?si=WpzhJdmP_fiD7SK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