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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아로운 생각 Aug 26. 2024

10대 그룹 임원 퇴직자가 주차 직원으로 일하며 본 것

#퇴직 3년차ㅣ10대 그룹 임원 이야기


저는 용인에 사는 50대 후반으로 3년 전에 퇴직한 사람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시가총액 5조 규모로 그룹의 자금줄 역할을 담당하는 회사였지요. 몇 년 사이 IT 업종이 뜨는 바람에 요즘에는 그 회사 다녔다고 하면 시큰둥하게 쳐다보지만 한때는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25년을 근무했습니다. 경영학이 전공이라 특별한 기술은 없어도 이 부서 저 부서 옮겨 다니며 주요 요직은 다 경험했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젊었던 시절에는 무조건 경영학이 최고였습니다. 경영학과 나오면 밥은 굶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기술을 배우는 학과가 차라리 나았겠다 싶습니다. 내 회사를 차릴 것도 아닌데 굳이 왜 갔나 싶은 마음이 퇴직하고 나니 더욱 커지네요     


제 마지막 직급은 상무였습니다. 정확히는 상무보였지요. 제가 다녔던 회사는 상무 직급 체계 안에 상무와 상무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상무가 상무보 위로, 상무보에서 실력을 검증받으면 상무로 올라가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상무보들은 처음 임원으로 승진한 초기 2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의 구간인 2년만 잘 넘기면 이후에는 롱런할 가능성이 훨씬 커지거든요.     


제가 갓 승진했을 때 선배 상무 하나가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상무보가 상무냐? 상무부터가 진짜 상무지” 뭐, 그땐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그 선배가 이런 이야기도 하더군요. “괜히 상무보 달았다고 오버하지 마. 1년 차 때는 조용히 지내다가 2년 차 때 작은 거 하나 터뜨리라구. 그게 장땡이야     


지나고 보니 그 선배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상무보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1년 차 때 뭔가 해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했는데 성과는 성과대로 안 나고 마지막에는 괜히 인심만 잃었거든요. 그 끝에 아주 칼같이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면에 그 선배는 아직도 회사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선배도 회사를 떠나겠지만 솔직히 부러운 게 사실입니다.     


퇴직 후 얼마 동안은 참 바쁘게 지냈습니다. 고맙게도 같이 근무했던 선후배들이 연락을 많이 주었습니다. 돌아가며 만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더군요. 밤마다 술을 원 없이 마셨습니다. 확실히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그런지 폭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술자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지막이라고 느껴져 한 두 달은 술에 절어 살았지요.     


그러다 점차 약속이 뜸해지니 못 견디겠더라고요. 꽉 찼던 스케줄이 사라지자 저만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넘쳐나는 시간을 어찌할까 고민하던 차에 아파트 게시판에서 구인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골프장 발레파킹 직원구함” 집 가까이 골프장에서 주차 직원을 모집하더군요.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운전이야 워낙 자신 있으니 어려울 건 없어 보였습니다. 새벽 6시부터 아침 12시까지, 근무시간도 맘에 들었습니다.     


골프장에서 제가 하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량이 들어오면 수신호로 정차를 유도하고, 트렁크에서 골프백을 꺼낸 후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면 되었습니다. 골프장은 새벽에 경기가 진행되다 보니 숙식 제공을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와 같은 조였던 사람 중에 두 명이 거기서 먹고 자고 하더라고요. 제가 한두 번 지각했을 때 그분들 도움을 받은 터라 몇 번 음료수를 사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성의 표시를 하고 귀갓길에 뚝불에 소주라도 하게 되면 그날 일당이 훅 날아가 버렸습니다. 시간당 제 급여가 11000원이었으니까요.      


“사고 치지 마세요” 골프장 관리부장이 직원들한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손님들한테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차 사고를 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괜히 불친절하다고 컴플레인이 걸리거나 고객 차에 흠집이라도 내게 되면 아주 골치 아파지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더 최악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일하고 있었는데요. ‘아!’ 누가 차에서 내리는데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여전히 현직에서 일하는 회사 입사 동기였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습니다. 숨을 데도 없고 어찌해야 하나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왜 여기 있어?” 잠시 뒤 저를 본 그 친구가 제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제가 유니폼을 입고 있었으니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짐작했을 겁니다. 놀라기는 그 친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표정이 살짝 굳어있었습니다. “수고해” 본인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지 연이어 짧은 인사를 하고는 쌩하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참, 그때 기분이란, 뭐라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그 친구, 위와 앞만 보고 산 탓에 다른 동기보다 진급은 빨랐지만, 주변에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저도 그 친구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만큼은 고맙더라고요. 제 근황을 꼬치꼬치 물었다면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세상 좁다더니, 그곳에서 그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얼마 후 저는 골프장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발레파킹 하는 제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제가 일했던 골프장이 대단히 인기 있는 장소는 아니라서 괜찮겠거니 했는데 더는 안전지대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잡념을 없앨 수 있었으니까요.      


요즘도 그 뚝배기 불고깃집, 가끔 갑니다. 뜨끈한 국물 첫 숟가락을 뜰 때면, 막 퇴직했던 황량했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 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dg97OWdhiC0?si=mAyD5byiFhbLUZP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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