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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운 Oct 25. 2024

interlude: 암순응

밤을 살라내어 글을 쓰는 사람

   밝고 환한 것이 나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자아였다.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중


   생각해 보면, 나는 밤을 살라내어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 많은 밤이 없었더라면 지금 보는 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전부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글도 세상에 나오지 못 했을 것이다. 쓰이지 않은 글들은 또 다른 밤을 기다리며 아직도 어딘가에 깊이 묻혀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로 밤과 낮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길이를 달리한다. 밝지 않은 낮도, 환한 밤도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밤은 여전히 밤이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밤. 우리가 밤을 ‘늦은 낮’이라고 부르기로 한들 밤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빛을 수용하는 감각이 변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장막에 가려 어둡게 보냈다. 그리하여 장막의 존재를 알아내고 때로는 용기 내어 거두어 두더라도 나의 시선은 어두운 것을 더욱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만다. 아무리 말간 대낮이라도 형체가 가득한 세상에는 꼭 그만한 그림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나의 고독과는 별개로 삶은 무수히 많아서 나의 밤이 꼭 나만의 밤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당신들의 밤이 때로 나의 밤이기도 하다는 것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지만 빛을 좇으며 살기에 인지되지 않은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이 여겨진다. 다만 이를 바라보는 단 한 줄기에 불과한 시선만으로도 ‘없던 것’은 ‘있는 것’이 되고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곧잘 그 한 줄기의 주인이 되고 만다. 개인적 삶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극에 가까운 현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결국 나의 희망이자 절망이다.


   그러나 밤에 대한 나의 내밀한 연구는 근 1년 사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어둠에 관한 연구는 역설적이게도 빛에 관한 그것과 정확히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여름 태양 아래의 그림자는 유난히 더 선명하고 짙으며, 짙은 어둠은 정확히 동일한 정도의 밝은 빛으로 인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오차 없이 똑같은 정도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어둠을 보는 동시에 빛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안다. 장막에 가려진 세상의 빛은 미약해 보이고 어둠은 더 짙어 보인다. 장막을 통해 본 세상은 빛보다 어둠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스스로 장막을 쓰지 않는다. 누군가의 세상이 유난히 깜깜한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그저 유난히 집요한 우연들이 모여 만든 공교로운 불운일 뿐이다. 그러나 장막의 존재를 아는 것, 그래서 그것을 걷어낼 수도 있게 되는 것은 불합리하게도 오롯이 그의 몫이다. 어느 날엔가 다른 종류의 우연을 만나 한 순간이라도 장막이 걷힌 세상을 엿보게 된다면, 그래서 지금보다 더 밝은 세상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나의 세상은 한 겹 더 그늘진 것일지 모른다고 의심해 볼 수 있다면. 그 작은 의구는 장막의 틈새를, 그 사이로 미약하나마 새어 들어오고 있는 빛 한 줄기를 마침내 발견하게 되는 순간을 내포한다.


   가려져 약해지더라도 끝내 틈새를 찾아 쏟아져 들어오고 마는 그것은 어쩌면 자아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빈틈없이 두텁게 가리더라도 반드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발견할 수밖에 없는 그것. 오랜 시간이 걸릴수록 더 눈부시게 그리고 더 아프게 알아야 하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닿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그것은 장막 밖에 선명히 빛나는 세상이 있음을 내게 알려주려는 나의 자아일지 모른다. 모든 마음 안에는 평생에 걸쳐 다가가도 결코 닿지 못 할 자신이 있기 마련이므로.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 서문에서 “모든 인생은 스스로에게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여정에 종착점은 분명 있으나 그곳에 도착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와 걸음이 향하는 곳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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