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의 이미지
분필의 이미지
나는 내 영혼은 사실 분필이다
가만히 있어도 분필 가루가 펄펄 날린다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분의 흔적이 남는다
아주 미세한 입자의 가루로
내 영혼이 흩어져 간다
흩어지지 말라고 부서지지 말라고
갖은 애를 쓰며
그러나 알게 되는 건 나의 무력함
내가 배운 건 실패와 좌절
날카로운 것으로 분필에 새긴다
실 패 절 망 좌 절 슬 픔
쓸 때마다 선명해지는 글자
이번이 몇 번째인지 이젠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영혼이 젖는다
많이 오래 올 수록 더 깊이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는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한다
아무리 우산을 당겨 써도 그런 날에는
녹아내린 내 영혼이 우유처럼 흐른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남겨지는 하얀 발자국
비를 맞아 용해되는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내 영혼의 물길
누군가의 손가락 하나로도 움푹 패는 날
그 흔적은 메워지지 않고 마르고 나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장마가 지나가면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한 점의 습기도 남지 않을 만큼
그렇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겨 못 쓰게 된다
영영 썩어버린다
영혼에 곰팡이가 생긴 흔적
썩었던 흉터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그 흉터까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때가 오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아주 오래
의식이 닿지 않을 만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흠뻑 젖고 바짝 마르는 시간
그 시간을 겪고 나면
조금은 단단한 분필이 된다
덜 흩어지고 덜 부서지는
그렇지만 잘 말리지 못 하면
장마를 이겨내지 못 하면
흔적 없이 분해될 수도 있다
장마가 올 때마다 사라지는 또 하나
유난히 장마가 잦은 세상이 있다
온 계절이 우기인 세상도 있다
그래도 분필은 하얗다
녹아버린 분필로 유지되는 세상이 있다
세상의 백색
그 안의 분필 한 자루
한 조각
한 점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