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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운 Oct 25. 2024

태양의 아이 side B

분필의 이미지

분필의 이미지



나는 내 영혼은 사실 분필이다

가만히 있어도 분필 가루가 펄펄 날린다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분의 흔적이 남는다

아주 미세한 입자의 가루로

내 영혼이 흩어져 간다


흩어지지 말라고 부서지지 말라고

갖은 애를 쓰며

그러나 알게 되는 건 나의 무력함

내가 배운 건 실패와 좌절


날카로운 것으로 분필에 새긴다

실 패 절 망 좌 절 슬 픔

쓸 때마다 선명해지는 글자

이번이 몇 번째인지 이젠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영혼이 젖는다

많이 오래 올 수록 더 깊이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는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한다

아무리 우산을 당겨 써도 그런 날에는

녹아내린 내 영혼이 우유처럼 흐른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남겨지는 하얀 발자국

비를 맞아 용해되는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내 영혼의 물길

누군가의 손가락 하나로도 움푹 패는 날

그 흔적은 메워지지 않고 마르고 나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장마가 지나가면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한 점의 습기도 남지 않을 만큼

그렇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겨 못 쓰게 된다

영영 썩어버린다

영혼에 곰팡이가 생긴 흔적

썩었던 흉터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그 흉터까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때가 오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아주 오래

의식이 닿지 않을 만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흠뻑 젖고 바짝 마르는 시간

그 시간을 겪고 나면

조금은 단단한 분필이 된다

덜 흩어지고 덜 부서지는


그렇지만 잘 말리지 못 하면

장마를 이겨내지 못 하면

흔적 없이 분해될 수도 있다

장마가 올 때마다 사라지는 또 하나


유난히 장마가 잦은 세상이 있다

온 계절이 우기인 세상도 있다

그래도 분필은 하얗다


녹아버린 분필로 유지되는 세상이 있다

세상의 백색

그 안의 분필 한 자루

한 조각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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