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에 병이 들었다
배롱나무에 병이 들었다.
3일 전부터 갑자기 배롱나무 잎이 시꺼멓게 변하더니 막 피기 시작했던 꽃이 모두 떨어져 버렸다.
강화로 와서 정원을 꾸미면서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배롱나무이다. 여름에 피는 꽃이 귀하기도 하고 꽃이 피면 오래가기도 해서 정원수로 인기가 많다는 조경업자의 말을 듣고 심은 것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 내가 뛰놀던 언덕과 뒷산에 아름드리로 있던 나무이기도 하고 할아버지 산소가에 크게 자라고 있던 나무가 배롱나무여서 주저 없이 그 나무를 선택했다.
내가 살던 고향의 아랫마을에는 마을 입구와 끝 부분에 야트막한 뒷산이 있고 그 산에는 제법 큰 규모의 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린아이 허리보다 훨씬 굵은 배롱나무 수 십 그루가 있었다. 우리는 아랫동네 아이들과 거기서 술래잡기도 하고 병정놀이도 하였다. 배롱나무는 곧게 커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굵은 가지들이 뻗어서 쉽게 올라갈 수 있었고 수피가 없이 매끈하여 나무에 오르기는 최고였다. 그 묘지는 오래된 것이라 후손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았고 겨울이면 묘지에 조성된 잔디에서 우리는 비료포대로 미끄럼을 탔다.
중학교 3학년 때 진주 근처로 전학을 가면서 그 놀이터(?)에는 가보지도 않았고 가끔 고향에 성묘를 가면서도 그 뒷산 놀이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보지 않아서 더 이상 모른다. 수 십 년 동안 그 배롱나무에 기억을 모두 잊고 있었는데 강화로 오면서 정원수를 고르다가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어 나의 손과 배의 땀이 묻어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큰 배롱나무가 생각났다.
이런저런 연유로 재작년 가을에 직경이 5센티미터 정도 되는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수형이 그렇게 이쁘게 잡힌 것은 아니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심은 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랬는지 작년에는 잎도 무성하지 않고 꽃도 거의 피지 않아서 유튜브를 찾아보며 그 원인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작년 겨울 직전에 퇴비도 듬뿍 뿌려주고 올 3월에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잔가지를 완전히 잘랐다. 새로 나온 가지들은 거의 잘라서 뭉툭한 볼썽사나운 모양이 될 정도로 강한 전정을 했다. 비료와 전정의 효과였는지 6월에는 잎이 무성해지고 새로운 가지도 많이 나와서 제법 볼만한 나무가 되었고 7월 중순에 꽃망울이 많이 맺혀서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보내면서 배롱나무 꽃이 곧 필 거라고 자랑질(?)까지 했다.
8월 초까지만 해도 오른쪽 가지 쪽으로 꽤 많은 꽃이 피어서 다른 가지까지 모두 꽃이 피면 분홍 배롱나무 꽃이 전방을 멋지게 장식해 줄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3일 전부터 배롱나무 꽃이 떨어져 버렸다. 나무에 가서 살펴보니 잎이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고 줄기도 시들었으며 새까맣게 개미들이 달라붙어서 부지런히 나무 위를 열심히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랴부랴 개미 퇴치제를 뿌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고 엊그제 살균제와 살충제를 섞어서 방제작업을 했다. 어제도 계속 개미가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농약을 뿌려주었는데 여전히 상태가 좋지 못하다. 진딧물과 응애 등의 해충과 이로 인한 병균까지 생겨 수액이 흐르자 그 수액을 먹으려는 개미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다른 것의 먹이가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배롱나무가 기력을 잃고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 수액을 먹으려는 또 다른 생명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영역 침범이 시작된다. 참 힘든 세상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즐거운 식사가 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일단 잘 살아남아야 할 일이다. 아침을 챙겨 먹고 또 배롱나무 상태도 챙겨보고 이제는 그 소임을 다한 오이덩굴도 철거하여 새로운 가을 모종을 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