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라벨의 기초 이해하기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불구불한 이텔릭체,
(멋도 중요하지만 가독성도 중요하지 않을까?)
브루고뉴, AOC, 샤블리, 소비뇽 블랑 같은 외계어,
(일단 몰라서 못 알아먹으면 내 기준에서 외계어다)
소비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와인, 가성비갑 와인과 같은 화려한 상업 용어들.
"이거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되는 거야?"
매장을 꽉꽉 채우는 와인들이 '이것 봐, 날 골라!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친다. 저마다 툭 튀어나올 만큼 볼록한 배를 툭 내밀며 배에 붙은 종이 조각을 살사 댄스 추듯 열심히 흔들어댄다. 그 모습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침착하게 눈을 살짝 비비고 다시 와인 하나를 집어든다. 기껏 와인샵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라벨에 적힌 글자들을 읽어보려 노력한다. 손바닥보다 작은 라벨 안에 와인에 관한 온갖 정보가 적혀 있어도 그 정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커다란 한숨이 터져나온다.
"저, 사장님? 어떤 와인이 맛있을까요? 추천 좀 해주세요(이때 약간의 수줍음은 디폴트값이다)"
결국 오른손을 백기 삼아 살랑살랑 흔들어 사장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빌어먹을, 완벽한 K.O패다.
앞서 말했듯 와인 라벨은 와인이 가진 정보를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와인에 과한 핵심 정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와인 라벨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다면 와인을 고르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다는 것이다.
다시 도돌이표다.
와인 라벨을 해석하지 못하면 와인을 고를 때 어렵다. 물론 요즘은 이런 사람들의 답답함을 시장에서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와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글이나 그림으로 붙여놓곤 한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나 스스로 와인을 내 취향껏 제대로 고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디자인이 땡긴다거나, 와인에 관한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던가, 네이버 블로그 리뷰가 좋다거나 하는 이유 말고. 와인에 대해 제대로 알고 고르고 싶다는 자기주체성의 발현이다.
그래서 오늘은 와인의 주요 산지와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지리적 표시 체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와인의 주요 생산지는 크게
1) 유럽(구대륙이라고도 한다)과
2) New World(유럽이 아닌 지역들)로 구분된다.
대항해 시대(유럽인들이 아시아,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로 뻗어나가던 15~18세기를 이야기함)를 거쳐 유럽인들은 아시아,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로 세력을 확장하며 그곳에 정착했다. 사람의 특성 중에 도통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미각'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맛있다고 생각하며,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해외 여행가면 컵라면이 그렇게 땡기질 않은가?(저만 그런가요?) 유럽인들에게 있어 와인도 그러한 식품 중 하나이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고향(유럽)에서 하던 방식으로 New world(대표적으로 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유럽 와인과 최신식 기술력을 앞세우는 New world 와인으로 구분하는 것의 시작이다(관련 사건은 다음 콘텐츠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유럽 와인의 경우 와인을 만드는 방식이 엄격하게 규제되는 편이고, 종주국답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보다 떼루아(와인밭이라고 생각하면 쉬움)에 포커싱을 두는 편이다.
반면 New world의 경우 유럽에서 전파된 방식(포도 품종이나 양조법 등)을 따르는 곳이 많다(같은 문화라는 뿌리를 공유하고 았으므로). 요즘은 최신식 기술을 앞세워 다양한 실험을 통해 개성적인 와인들을 많이 생산한다.
New world는 유럽에 비해 대체로 따뜻한 기후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생산되는 포도에 당도(와인의 알코올 도수를 결정)와 탄닌 성분(와인의 쓴맛을 결정)이 많은 편이다.
(참고 : 와인 추천 : 달달한 와인의 도수는 이것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무거운 바디감, 강한 과일향, 높은 알코올 도수가 특징이다. 라벨에 와인 생산자, 브랜드, 포도 품종, 와인명을 보기 좋게 적어놔서 와인을 고를 때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전세계의 물산이 실시간으로 왕래하게 됐다. 자연히 유럽 와인이 New world로, New world의 와인이 유럽으로 수출됐다. 시장에 각양각색의 와인들이 등장하며 와인의 생산지를 정리하는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지리적 표시(GIs, Geographical indications)'이다. WSET에 따르면 <지리적 표시>는 '한 국가 내에서 법률로 규정된 포도밭 지역'을 의미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기 때문에 전세계 와인 생산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와인 라벨에도 기재되어 있다.
말을 어렵게 했는데 사실 별 거 없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돈을 더 받기 위해 '내가 생산한 와인은 쟤네가 생산한 와인이랑 급이 달라!'를 교양있게 표기한 것이다. 구별짓기를 통한 차별화 전략이다
(내 피땀눈물 다 투자해서 와인 만들어 놨으면, 기부 천사가 아닌 이상,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어야 할 것 아닌가? 다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짓이다. 이걸 인지하고부터는 와인 라벨에 조금 관대해졌다.)
<지리적 표시(GIs)>는 다시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1) 유럽 연합 외의 지리적 표시(=New world 와인)
-와인을 만드는 '포도 생산지'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포도 재배나 와인 양조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 없어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우당탕탕 우영우 스타일 느낌이다)
2) 유럽 연합 내의 지리적 표시(=유럽 와인)
-와인 양조(만드는 법), 포도 품종 등 온갖 규제를 시행한다(얘네 입장에서는 전통 계승이라 규제라고 생각도 안 할 것 같다)
-온갖 규제 덕분에 일정한 패턴의 와인들이 생산돼서 소비자 입장에서 와인맛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권모술수 권민우 느낌이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구별짓기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현란한 마케팅을 시도하는 인간의 속성은 '유럽 연합 내의 지리적 표시'를 다시 세분화했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쓰이는 구분법을 체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럽 연합 내의 지리적 표시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기존에 썼던 체계를 존중하고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유럽 연합 내의 지리적 표시가 체계화 되기 전부터 유럽의 각 나라는 자기들만의 와인 생산지 구분법이 있었다)
유럽 연합 내의 지리적 표시는 크게
1) 원산지 지정 보호 와인(PDO,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비유하자면 흥선대원군 스타일(전통 고수)
-지리적 표시 보호 와인(PGI)에 비해 소규모 지역에서 이루어지며 와인을 생산할 때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함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들의 상당수가 PDO 따름(=PDO 붙으면 대체로 비싼 와인들이란 소리)
-프랑스의 AOC 체계(진정해요, 후에 설명할게요. 아직 몰라도 괜찮아요)가 PDO 체계를 만드는데 기여함
2) 지리적 표시 보호 와인(PGI, 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
-비유하자면 자유분방 스타일(내 쪼대로 간다)
-PDO에 비해 넓은 지역을 의미하며 규제가 비교적 자유롭다.
-다양한 양조 기법을 사용할 수 있어 대량 생산, 가성비 와인, 프리미엄 와인 모두 생산한다
2가지로 나뉜다. 정리하자면 -
이렇게 되는 셈이다.
와인 입문서들을 살펴봐도 머리에 그릴 수 있을 만큼의 체계가 잡혀있는 경우가 잘 없어서(적어도 내가 봤던 입문서들은 그랬다) 이렇게 정리해봤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1) 그냥 PDO가 대체로 비싸고
(디테일한 전통을 고수하려면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들지 않겠는가? 가격 타협이 안 될 테니),
2) PGI가 대체로 좀 저렴하다
로 정리하면 쉽다(예외적인 경우들도 있지만 초짜들에게 그런 디테일까지 구분하라고 하면 너무 잔인하다).
유럽은 원산지 지정 보호 와인(PDO)과 지리적 표시 보호 와인(PGI)이 각 나라별로 지정된 체계가 따로 있다. 그래서 유럽 와인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편이다.
아래의 그림과 같은 체계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나라별로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몇몇 국가는 국가 내에서도 다시 지역 단위, 포도밭 단위로 구분짓기도 한다(프랑스가 대표적으로 그렇죠)
그러나 이 부분을 대략적으로라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으면 어떤 것이 비싼 와인인지, 어떤 것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와인인지 정도는 구분 지을 수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씩 간다고 하질 않던가.
급할 것 없다. 천천히 하나씩 이해하면서 가다보면 언젠가 와인 체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도를 머리 속에서 그릴 수 있다. 오늘은 딱 아래 그림 정도만 기억해도 대단한 거다.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지리적 표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벌레 한 마리가 가져온 역사적 사건, 필록세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바로 지리적 표시 제도를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분명 지치므로).
오늘 지리적 표시를 정리해보니 나 스스로도 이제 그림이 조금씩 그려진다. WSA 와인 아카데미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스스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이 크다.
지금 이렇게 차근차근 정리해두면 언젠가 와인 입문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하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이 새삼 즐겁다.
누군가 여왕에게 '오늘 하루 가장 보람있었던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여왕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