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지?"
진정해라, 나 자신.
종잇장마냥 바사삭 구겨지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온몸을 강타하는 쓴 맛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려는 것을 '진실의 미간'으로 바꾸기 위해, 본능을 거스르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건 신종 테러 수법인가? 교수님, 제가 뭘 잘못했죠?'
정신 차려, 사회 생활이야.
초인적인 힘으로 '진실의 미간'을 만들어 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계신 교수님께 '엄지 척'을 날렸다. 본인이 사오신 와인에 잔뜩 심취되어 계셨던 교수님은 내 얼굴 근육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알지 못하셨다.
"크하하! 역시, 우리 나봄이는 뭘 좀 안다니까? 한 잔 더해! 이거 내가 프랑스 출장 갔다가 비싸게 사온 거야! 좋은 술은 같이 마셔야 하는 법이야."
'이렇게 비싼 술로도 미각 테러를 당할 수 있구나.'
어느 동네의 고급 빈티지, 고가의 와인이라는 것 따윈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 와인은 알코올 램프맛 소주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던가. 5년 간의 사회 생활 경력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영혼이 와인의 육탄 테러 공세에 정신이 너덜더덜해졌을 때, 나는 '미각'을 내어주고 교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얻어냈다.
그때의 사건 이후 와인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다.
사건 전까지는 '와인을 마시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Ok♥(하트가 중요하다)'부터 날렸다. 함께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상대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할 때는 '해롱해롱 해롱이 상태'가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맛있는'이다.
이전까지는 메뉴판을 볼 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어련히 가게 사장님이 괜찮은 와인을 잘 가져다 놓으셨겠지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건을 겪은 후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단골 가게 사장님이 깔아주신 꽃밭에서 놀고 있었구나. 그냥 사장님이 내 취향에 맞게 추천해주셔서 행복했구나.
그때부터 와인을 고를 때 메뉴판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가졌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나봄이는 와인에도 관심이 많아서 메뉴판도 꼼꼼하게 살펴보는구나!'라고 칭찬했지만, 기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 탄닌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지
-와인의 쓴 맛을 좌우하니까
2) 당도가 어느 정도인지
-안전한 건 모스카토 다스티
-귀부 와인, 아이스 와인이면 더 좋다
-디저트 와인은 사랑이다(혼자 한 병 끝낼 수 있음)
3) 원산지는 어디인지
-유럽 대륙 와인을 선호한다(ex 스페인, 이탈리아).
-New world(미국,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칠레)를 골라서 결말이 좋았던 적이 없다
정도만 확인한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도 대체로 큰 지뢰는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지라 가끔씩 와인을 잘못 골라 생기는 미각 테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실로 궁금해졌다.
이 해답을 WSA 와인 아카데미의 WSET level2 수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 고민 해본 적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와인의 가격 차이는 '땅 값'차이다. 와인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본주의 냄새가 솔솔 나는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어쩔 수 없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가 태어나는 곳 자체가 땅인것을.
통상적으로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핵심 영향 요소는 크게 5가지이다.
이 5가지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2) 환경이다.
나머지 요소들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요즘은 포도 상태가 안 좋아도 양조 기술이 발달돼서 일정 수준 이상의 와인 맛을 구현할 수 있다) 환경은 아직까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봐야 할 점은 기후와 토양이다.
날씨는 워낙 변칙적이라 일정한 패턴이 없지만 기후와 토양은 패턴이 있다. 쉽게 말해서 내 취향의 와인이 생산되는 기후와 토양 조건만 알고 있으면 와인을 고르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의미다.
1) 1년 내내 일정한 온도이고(지중해성 기후)
2) 겨울이 우기이며(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안 된다)
3) 한류(차가운 해류)가 지나는 곳(마냥 더워서는 안 됨)
이 3가지 기후 조건이 충족되는 곳의 포도가 좋은 와인을 빚는 재료가 된다. 대체로 이런 기후 조건은 위도 30~50도에 형성된다(요즘은 지구온난화 때문에 조금씩 변경되고 있지만).
이런 곳을 와인 벨트라고 한다. 유명한 와인 산지(ex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북부, 미국 등)는 대체로 와인 벨트에 있다.
포도가 자라는 곳의 기후가 따뜻하면 포도의 껍질이 점점 두꺼워지고, 과육이 달달해진다. 이런 경우 레드 와인을 빚기 유리한 조건이다. 기후가 따뜻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빚은 와인은 산도(신맛)가 낮은 대신 도수(알코올 함량)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와인의 맛이 대체로 묵직하다. 신맛을 싫어하거나, 도수가 높은 와인을 찾는 경우에는 1) 호주, 2) 스페인, 3) 아르헨티나, 4) 칠레 중부 지역에서 만든 와인을 찾으면 크게 실패할 일이 없다.
반면 포도가 자라는 곳의 기후가 서늘하면 포도의 껍질이 기후가 따뜻한 곳에서 자란 포도보다 얇아진다. 이럴 경우 포도에 신맛이 많이 나는데 이런 특성을 활용해서 화이트 와인을 많이 만든다. 소위 '프레쉬한 와인'은 산도가 있는 포도를 활용해서 빚는다. 기후가 서늘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빚은 와인은 상대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낮고, 와인의 맛이 가벼운 편이다. 그래서 산뜻한 와인을 찾거나 도수가 높지 않은 와인을 좋아할 경우 뉴질랜드(소비뇽 블랑 품종), 독일(리슬링), 프랑스 북부, 캐나다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선택하면 크게 실패할 일이 없다.
와인을 구입하다보면 '빈티지'가 있는 와인이 좋다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빈티지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질까?
빈티지는 쉽게 말해 포도를 수확한 연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와인병에 2019라고 적혀 있으면 2019년의 날씨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의미이다. 통상적으로는 2000과 2010년에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압도적으로 품질이 좋다(특히 2000년이 그러하다. 그래서 대체로 고가의 가격대에 형성되어 있다). 2004, 2005, 2014, 2015에 자란 포도로 빚은 와인은 평타 이상이라고 평가한다.
빈티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구글에서 '와인 빈티지 차트'를 검색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당해에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빈티지를 붙이기 어렵다. 빈티지는 최소 4~5년 정도의 검증 기간이 지나야 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대륙으로 구분하자면 유럽(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과 같은 대륙성 기후에서 주로 고가의 와인이 생산된다. 그래서 유럽의 와인을 고를 때는 빈티지가 중요한 와인 평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해양성 기후(지중해를 떠올리면 쉽다)에서 자란 대부분의 와인들은 거의 수준이 고만고만하다. 요즘은 양조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어떤 연도를 선택하더라도 못 먹을 와인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누군가에게 와인 선물을 한다면, 어느 정도 검증된 연도의 와인을 선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럴 때 빈티지라는 기준을 활용하면 좋다.
내가 WSET을 공부하며 깜짝 놀랐던 점들 중 하나는 와인을 빚을 때 사용하는 포도는 <척박한 땅에 자란 것>을 상등품으로 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들 중 하나는 '토양'이다. 와인을 빚을 때 사용하는 포도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속된 말로 포도를 좀 굴려야 된다. 사람도 산전 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은 사람의 바이브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은가.
고생을 많이 한 포도가 좋은 와인을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포도를 데굴데굴 굴려서 맛있는 와인은 만들 수 있을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와이너리는 아래의 조건을 충족한다.
1)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며
-혹 프랑스 와이너리를 구입할 예정인가?
무조건 언덕이다. 와인을 빚는 포도가 잘 자라기 때문에 언덕이 비싸다.
-언덕 아래 강변이 있으면 이건 별 다섯 개짜리다.
2) 돌이 많아 척박하고 배수가 잘 되고
-지하수가 무수한 돌들을 스쳐지나가며 미네랄을 머금게 된다. 그걸 포도가 흡수한다.
-와인이 굉장히 독특한 맛이 난다면 와인을 빚은 포도가 자란 곳이 미네랄리티(미네랄 성분)가 좋은 곳일 확률이 높다
3) 토양에 영양분이 많다.
-독일의 모젤 지역에서 나는 와인은 '석유향'이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모젤 지역이 점판암 토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리슬링 품종이라도 모젤 지역에서 자라면 석유향이 날 수 있다.
훌륭한 와이너리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곳을 '떼루아(terroir)'라고 한다. 우리가 통상 잘 아는 프랑스 보르도, 브루고뉴가 유명한 떼루아의 사례다. 여기서 떼루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땅을 의미하지 않는다. 땅속의 특별한 지질 특성이 있는, 그래서 와인의 독특한 개성을 부여할 수 있는 땅을 '떼루아'라고 한다.
떼루아의 중요성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토양의 미네랄은 포도의 맛을 결정한다.
토양을 구성하는 미네랄이 한 종류라면 포도는 미네랄을 한 종류만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포도가 발휘할 수 있는 맛은 한 종류 밖에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토양을 구성하는 미네랄이 [ 예시 2 ]처럼 여러 종류라면? 포도는 다양한 미네랄을 섭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란 포도로 빚은 와인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미네랄이 섞이며 독특한, 그래서 개성 있는 맛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도 얼굴'만' 예쁜/잘생긴 사람보다는 얼굴'도' 예쁘고/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으면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와인도 똑같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와인, 신의 물방울로 불리는 로마네 콩티가 복합적인 미네랄을 섭취한 포도로 생산된 대표 와인이다. 로마네 콩티를 생산하는 포도 나무(피노누아)는 뿌리가 지하로 수십, 수백 미터까지 뻗쳐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하의 다양한 지질 속 미네랄을 섭취할 수 있다. 로마네 콩티의 독특한 풍미는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떼루아는 아무 곳이나 지정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검증한 곳만이 떼루아로 지정될 수 있다. '이 땅에서는 반드시 이런 맛의 와인이 나온다'는 확신이 있을 때 떼루아가 된다. 그래서 New world(미국, 호주, 아르헨티나, 칠레, 뉴질랜드)쪽에서는 떼루아로 인정될 만한 곳이 거의 없다. 와인을 생산한 역사가 구대륙인 유럽에 비해 짧아 검증을 제대로 거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강남이 <부동산계의 에르메스>인 이유는 간단하다.
훌륭한 학군, 풍부한 유동인구, 그에 따른 상권 형성, 대형 병원 입지 등 사람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사람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땅을 찾기가 쉬울까? 조금이라도 임장을 다녀봤다면 공감할 것이다. 생각보다 흔치 않다. 그래서 지방이라도 소위 '시내'라고 불리는 곳의 땅값이 비싼 거다.
와인도 동일하다.
1) 이상적인 기후 조건
2) 포도가 잘 자라기에 좋은 땅
이 2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땅이 흔할까?
당장 우리나라를 떠올려보라.
와인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지역이 있던가?
극히 드물며, 국제적으로 떼루아로 지정될 만한 곳은 (현재까지) 없다
(찾으면 대박나는 거다. 떼루아를 찾는 직업이 따로 있을 정도다).
기후와 토양을 제외하고도, 이상적인 날씨, 싱싱한 포도, 숙련된 양조 기술까지 가미되어야 제대로 된 와인이 생산된다.
위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서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질좋은 와인을 못 먹는다는 소리냐?'하면 그건 아니다. 참 감사하게도 우리는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와인을 만드는 양조 기술 역시 혁신적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아무 와인을 선택하더라도 못 먹을 정도의 와인은 없는 것이다(선생님 말씀으로는 옛날에는 싼 값의 와인들 가운데에는 못 먹을 정도로 형편 없는 것도 많았다고 한다).
확실히 4천 원짜리 와인보다는 4만 원짜리 와인이 맛있다. 하지만 100만 원 이상부터는 그 땅이 가진 유니크함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쉽게 말해 내 취향대로 가기 때문에) 땅값과 와인값은 비례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와인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취향의 와인이 꼭 비싼 것은 아니었다.
WSA 와인 아카데미에서 와인 테이스팅을 할 때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그래서 구매 의사가 충만했던 와인은 4번째 와인이었다. 로얄 토카이5 푸토뇨스 아쑤(Royal Tokaji 5 Puttonyos Aszu)라는 와인인데 헝가리에서 만들어졌으며 가격은 6만 원대이다.
그런데 와인을 알려주시는 선생님 말씀으로는 비전이 있는 와인은 3번째 와인이었다. 포멈 야키마밸리 카베르네 쇼비뇽(Romum Yakima Valley Cabernet Sauvignon)이란 와인인데 미국 와인으로 가격은 10만 원대이다. 3번의 경우 목넘김이 깔끔했지만, 탄닌 함량이 높아 마실 때 치아가 꺼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입 안이 껄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그다지 선호하는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4번의 경우 탄닌이 어느 정도 있지만 그만큼 당도가 높아 (나봄 기준에서) 밸런스가 잘 맞는다. 달달한 열대 과일맛(주로 망고맛)이 나서 홀짝홀짝 혼자서 잘 마실 스타일이었다.
와인 테이스팅 수업을 들은 첫날,
내가 내린 결론이다.
누군가 여왕에게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여왕은 이렇게 대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