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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서란 Sep 28. 2023

인삼을 공짜로 준다고? 공짜의 함정

미니멀 쇼피엔스 – 무료의 현혹편

“○○아파트 주민 여러분! 지금 아파트 정문 앞으로 오시면 금산인삼 한 봉지를 공짜로 드립니다. 금산인삼축제에 많이들 오시라고 홍보하는 거고, 절대 파는 거 아니니까 지갑은 두고 나오세요.”


며칠 전 인삼을 공짜로 나눠준다는 차량 방송이 들려 밖을 내다보니 정문 맞은편에 주차된 트럭 앞으로 사람들이 몇 명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짜는 미끼고, 보나 마나 물건 팔려는 거겠지’ 생각에 무시하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앞으로 딱 15분 동안만 나눠드리고 갈 테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얼른들 나와서 인삼 받아 가세요” 라며 호객 방송이 계속됐다. 사람들이 트럭 근처로 계속 모여들길래 호기심이 발동해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 모인 열서너 명 남짓한 사람들 중 젊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네댓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다들 어찌나 질서를 잘 지키는지 한 줄로 서서 인삼을 나눠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트럭에서 담당자(?)인 듯한 사람이 나눠준 작은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어느 정도 사람들이 다 온 것 같으니 트럭 짐칸에 올라선 담당자분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트럭을 빙 둘러싸고 비닐봉지를 벌리고 서 계시면 제가 바로바로 인삼을 나눠드리기 쉬우니 이리 가까이들 오세요. 오늘 여기가 일정 마지막이고 인삼은 골고루 많이씩 나눠드릴 테니까 행여 못 받아 갈까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부터 제 얘길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담당자는 가로세로 20×20cm쯤 되는 작은 비닐봉지에 한 주먹씩 골고루 담아주기 시작했다. 작은 비닐봉지의 반의반도 안 되는 양이었다. ‘많이씩 나눠주신다더니 양이 너무 적네’ 생각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조금 더 달라고 얘기가 나왔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그분은 “기다리세요. 제가 아까 제 얘기 잘 들으면 많이 받아가신다고 했죠?” 라면서 조금은 지치고 짜증 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한 번에 가득 채워드리면 그거만 받고 제 얘긴 안 듣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조금씩만 나눠드린 거고, 계속 드릴 테니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이 인삼은 10월에 열리는 금산인삼축제에 많이 오시라고 홍보차 나눠드리는 거고, 절대 조합에서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지역 축제 홍보를 위해 농민 개인이 사비 털어서 인삼 나눠드리는 거니까 고맙게 받으시고 금산인삼축제에 많이 오세요.”


진짜 순수하게 축제에 많이 오라고 개인이 힘들게 농사지은 인삼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왜?


그분은 인삼 외에 인삼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면서 쌀비누, 보리쌀 샘플, 밥주걱 등 인삼과 무관한 물건들을 몇 개 더 나눠준 후 본격적으로 발효흑삼이라는 인삼 농축액 제품을 광고하기 시작했다.


“시중에 파는 홍삼 제품은 함부로 드시면 안 돼요. 홍삼은 몇 프로 들어가지도 않고 물하고 물엿만 잔뜩 넣어 만든 제품이 수두룩한데, 이 제품은 물엿 같은 거 하나도 안 들어가고 순수 인삼만 발효해서 만든 거라 비교 불가예요. 정관장에선 이 제품이 브랜드 이름만 달고 두 배 이상 가격으로 팔아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에 한해서만 특별히 이 500g 대용량 발효흑삼 제품 두 박스를 무료로 드립니다.”


필요하신 분 손 드시란 말에 모두가 손을 들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사실 좀 전에 윗선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특별히 세 분한테만 두 박스에 추가로 한 박스 더 얹어서 드릴 테니 누구 주지 마시고 혼자만 드세요. 그리고 우리가 두 박스를 공짜로 받았는데 양심이 있으면 한 박스 가격은 내고 먹읍시다. 6만 원씩 몇 달만 내고 세 통 다 드시면 공짜지 뭐. 기회를 다 드릴 수는 없으니 나머지 분들은 필요하시면 나눠드린 종이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하셔서 한 통에 38만 원씩 내고 구입하시면 돼.”


“6만 원씩 몇 달만 내고”라는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은 빠르게 말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마 제대로 못 들은 어르신들도 많았을 거라 생각된다. 믿을 만한 정직한 제품임을 강조하며 지금 당장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라고 해서 찾아본 홈페이지 제품소개에는 ‘소비자가 380,000원’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그분은 “소비자가는 원래 그렇게 눈에 잘 띄게 표기해야 믿을 수 있는 제품”이라고 덧붙였다. 이건 또 무슨 얘기지? 게다가 홍삼 외엔 다른 건 들어가지 않았다는 설명과 달리 회사 홈페이지 제품소개에 적힌 원재료 함량에는 물엿과 향료가 들어가 있었고, 다른 한약재가 들어간 대신 홍삼 함량은 낮았다.


그날 최종적으로 할아버지 두 분이 제품을 구입했다. 그 상황에서 사지 마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좋은 거라 믿고 먹으면 플라시보 효과도 있으니, 부디 좋은 걸 저렴하게 잘 샀다 생각하고 잘 드시길 바라는 수밖에. 할아버지들이 구입을 위해 구석에서 다른 직원분과 이야기 나누는 동안 그분은 사람들에게 다시 인삼을 한 주먹씩 나눠줬다. 그러면서 “인삼 필요하신 분들께는 오늘 아침에 캔 싱싱한 인삼을 1kg당 만 원에 드릴 테니 싸게 가져가세요”라고 하더니 저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맨바닥에 인삼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공짜 인삼만 받고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그분은 갑자기 양심고백을 하셨다.


“그래, 내가 솔직히 말할게. 아까 그 흑삼 내가 그 회사 대표야. 홈페이지에 보면 대표 이름 ○○○이라고 나와요. 그게 나야. 인삼이랑 발효흑삼 다 어디 가서 이런 물건 못 구해.”


아까 설명할 때는 오늘 아르바이트하는 거라 얼른 인삼 일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회사 대표라고? 발효흑삼은 윗선에서 연락 와서 무료로 얹어주는 거라더니 회사 대표의 윗선은 누구일까? 방송할 때 지갑 갖고 나오지 말라고 유인(?)해 놓고 자꾸 물건을 파시질 않나...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할까? 그분에게는 이날이 공친 날이었을까 수익이 있는 날이었을까.


사실 마지막 말씀을 하기 전까지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공짜 인삼 받고 미안하기도 하고, 인삼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1kg은 사 오려고 했다. 또 그분이 너무 피곤하고 지쳐 보여 하루 종일 저렇게 마을을 돌며 쉬지 않고 말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공짜 인삼만 받고 ‘먹튀’를 했다. 인삼을 구입하는 순간, 거짓으로 사람을 모으고 거짓으로 물건을 파는 행위에 동조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럼 공짜 인삼도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건 30분이나 설명을 잘 들어주고 호응해 준 내 시급이라고 합리화했다. 나 같은 들러리가 있어 할아버지 두 분이 제품을 구매하시게 된 거라면 이게 더 나쁜 건가? 여러 생각이 든 날이었다.

공짜로 받아온 인삼은 차로 끓여 먹으려고 잘라서 말려 놓았다. ⓒ은서란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종종 노인 대상 떴다방 같은 곳에서 가서 물건을 사 오신 적이 있었다. 한 켤레에 몇만 원씩 하는 양말이나 값비싼 속옷, 매트, 그 외에도 가족들 모르게 질 낮은 물건을 비싼 값에 사고, 사은품으로 화장지와 쌀통 같은 걸 받아 오시곤 했다.


‘공짜’, ‘무료’사람을 현혹시킨다. 폭탄 세일, 1+1 이런 할인 행사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쇼핑할 땐 몇 만 원 이상 배송비 무료 조건을 맞추기 위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굳이 찾아내 추가로 구입하기도 한다. 1+1 제품은 원래 물건가를 뻥튀기하는 경우가 종종 문제 돼 왔고, 배송비를 안 내려고 시간 들여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면 후회할 때가 많아 언젠가부터 난 그냥 배송비를 내고 필요한 물건만 사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공짜 인삼을 나눠주는 트럭에서 할아버지 두 분이 비싼 값에 발효흑삼 농축액을 구입하는 거나 어르신들이 떴다방에서 질 낮은 물건들을 비싼 값에 사는 걸 안타까워하거나 흉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젊은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마켓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은 사람들도 온라인에서 매번 광고에 현혹당하며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광고에 동원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유튜브 광고, SNS광고, 포털사이트 광고 등등 매 순간 광고 속에 산다. 이제는 너무나 대놓고 뻔뻔하게 광고를 하기도 하고, 소비자는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다들 자신이 말한 것이 SNS나 유튜브 광고로 뜬 걸 보고 놀란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부터 내가 말하는 것과 관련된 제품이 핸드폰 속 세상에서 광고로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휴대폰에서 마이크 권한설정을 끄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적이 없는데도 귀신같이 알고 내가 생각했던 제품 관련 광고가 뜨곤 한다. 어떨 땐 내 속마음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며 살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광고에 현혹돼 당장 필요 없던 물건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져 구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목적 없이 구입한 물건은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떻게든 다 대가를 지불하게 돼 있다. 그리고 싸고 좋은 물건도 없다. 비싸다고 꼭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좋은 물건이 저렴한 경우는 드물다. 피곤하더라도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제대로 만들어진 좋은 물건인지 제대로 따져보고 살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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