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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Nov 16. 2023

off and on




OFF


눈은 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단속을 한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혹사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경미한 안구건조증이 있기도 해서 생긴 버릇인데, 눈단속은 눈을 굳이 안 써도 되는 순간엔 닫아 놓는 것을 말한다. 하나 둘 일상에서 눈을 닫아도 되는 순간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에 있는데 최근엔 애호박 썰기도 추가되었다. 편썰기까지는 눈을 뜨고 잘 눕힌 후, 채썰기부터는 감는다.


자판을 치다 눈을 감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거나 도마 위에 가지런한 야채를 손의 감각에만 의지하여 써는 행위 등은 눈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감각 운용이 섬세해지는 것 같아 흐뭇함도 올라온다.


아직 감자나 당근은 해 보지 않았으나 앞으로도 할 생각은 없다. 눈 감고 썰어도 되는 야채는 따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모험에는 적절량의 안전장치가 필요한데 감자나 당근은 눈을 버젓이 뜨고 썰어야 한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말하고 있다.



ON


눈이 꼭 필요할 때에만 써 버릇하다 보니 쓸 때의 기쁨이 크다.


나는 산책할 때 눈을 펑펑 쓰는데, 두 눈으로 유입되는 센세이션에 눈알 뒤편으로 '지잉-' 팬이 돌아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물론 반쯤 잠긴 평소 눈에도 기쁨은 흐르지만 다른 맛이다. 펑펑 쓸 때는 친구들 만나 신나게 노는 흥분에 가깝고, 반쯤 닫힌 눈은 엄마가 나 밥 먹는 걸 바라보던 눈을 닮았다. 연희는 각종 채소잎을 쪄서 자랑스레 내놓곤 했는데, 내가 우엉잎에 강된장을 넣어 싸 먹으면 '맛있나? 맛있제?' 하곤 했던 것이다.


여닫는 일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눈을 열 것인가도 커다란 관심사다.


주말에 시댁에 다녀왔는데, 주로 큰 시누 둘째 딸 얼굴을 향해 많이 열었다. 큰 시누 둘째 딸은 나를 좋아하고 나도 이 딸내미를 좋아한다. 자꾸 보다 보면 친조카들이 보고 싶어 진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부엌에 가 보니 눈이 활짝 열리는 식재료가 보인다. 껍데기가 온전히 붙어있는 통삼겹 덩어리! 미국은 보통 껍데기가 제거된 상태로 유통되므로 흔치 않은 재료를 보자 창작욕이 솟았다. 시댁 식구들은 요리에 흥미가 없기에 내가 요리할 때면 신기한 눈으로 내 주변을 기웃거린다.


수비드(sous-vide) 방식으로 익힌 후 껍질 부분을 살짝 구워 냈다. 한 김 식힌 후 칼을 데는데 잘 칠링 된 청포묵 써는 느낌에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었고, 접시에 담아내자 8인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기 전에는 눈을 감고 허공꽃을 바라본다.


허공꽃의 의미는 분분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냥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다.


이를 위해 평소에 좋은 것들을 많이 봐 놓으면 좋은데, 사실 눈 말고 마음으로 이것저것 더 많이 보기 때문에 매일 죽자 사자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 눈으로는 예쁜 것들이 들어오고 마음속 지저분한 풍경도 정리된다. 그러면 잘 때 예쁜 허공꽃을 볼 수 있다.

큰 시누 둘째 딸이 만들어준 목걸이. 통통한 손으로 이런 섬세한 작업을 해 내다니... 감동에 겨워 주말 내내 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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