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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06. 2023

햅쌀의 기억






미역국에 쌀밥을 좋아한다.

반찬은 김치.


명절 기간 동안 시달린 오장육부에 면목이 없어서 치르는 작은 의식이기도 하지만, 그냥 맛있다. 밥 씹다가 김치 한 조각 먹고, 그다음 순서로 미역국 입에 들어가면 행복하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박수를 짝짝 치기도 한다. 가끔은 행복의 역치가 이리도 낮은 내 모습이 웃기고, 그 와중에 맛있어서 또 박수를 짝짝 친다.


미국에 와서 야식을 끊었다.

한국에서는 밤에 작업할 일이 많았는데, 허기진 상태로 잠들기 아쉬워 뭔가를 먹고 잤고 그게 내 성질을 괴팍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침 형에 가까운 사람인데 밤 형으로 살았으니 건강상태와 성질머리가 멀쩡할 리 없었다.


수면 패턴도 나만 감지되는 트렌드가 있는데 요즘 나는 아침 7시 30분 형 인간으로 보인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면 그날 하루종일 먹는 음식이 한층 더 맛있다. 나는 미라클모닝보다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 파라서 가끔 환절기 때는 오전 9시까지 자기도 한다.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차차 다음 달부터는 아침 8시 형 인간이 될 것 같다. 주변 것들이 다 돌고 도는데 나도 맞춰 돌아야지 별 수 있나 한다. 여름엔 6시쯤 일어난다.




사실 반찬을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이렇게 산 지 10년 넘었다. 계기는 반찬이 필요 없는 사람과 결혼해서이기도 하고, 한가득 차려져 있는 음식을 보면 숟가락 들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한식이나 일식을 만든다 치면 대부분 한그릇음식 위주로 하거나, 파스타나 피자를 해도 보통 그것만 하고 다른 것들은 만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손님 맞이 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날들이 소박하다.




혀가 기뻐 날뛰는 순간은 음식 가짓수에 달려있다기보다는 로고스가 원만하게 구현된 음식이 하나라도 있을 때이다. 그런 음식은 입에 들어가면 배시시 웃음이 나면서 은은한 기쁨이 오래 머무른다.


이런 맛에 길들여지면 작은 자극에도 쉬이 기쁘고, 재료가 신선하다는 것 자체로 더할 게 없다.


원재료의 온전함. 그 첫 경험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일어났다. 시골 이모네에 갔는데, 이모가 햅쌀로 밥을 지어주셨다.


밥알이 투명했다. 흰 석류알이 한가득 담긴 듯한 밥그릇을 한참 신기하게 바라보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여태 먹은 밥알들은 입 속에서 뭉쳐 돌아다녔으나 이들은 알알이 개별적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게 소리쳤다.


 아찌야! 내가 바로 쌀이다!


지수화풍의 생명력이 입안 가득 차오르며 내 몸에 '바른 쌀밥'의 느낌이 재정립되었다.


이런 쌀만 먹은 혀는 바른말만 할 것 같다는 망상마저 올라왔고, 그 후로 운 좋게 시골에 살게 된 나는 마트에 파는 햅쌀 말고 진짜 햅쌀을 먹을 일이 많아져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혀로 하는 일들이 참 많을 텐데 먹는 얘기만 한 것을 보면 나는 소식좌지만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최근에 먹은 바른 맛은 브라질 친구가 가져다준 커피 정도.


아! 그리고 어제 먹은 밤.

요즘 고구마에서 밤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데 남편이 내 트렌드를 읽고는 간밤에 멕시칸 마켓에서 밤을 사 온 것이다.


맛있는 밤은 껍질에 뺀질뺀질 광이 나고 통통하고 그래야 되는데 껍질에 광채가 없길래 별 기대 안 하고 칼집 좀 내서 심드렁하게 미니오븐에 넣었다.


하나 까서 먹어보니 색, 향, 그리고 풍미 면에서 '진정한 밤의 됨됨이'가 입 안에서 팡팡 터지는 게 아닌가. 나는 한입 먹고 박수를 짝짝 치다, 남편 등짝도 짝짝 치고 먹던 밤 사진을 백장 정도 찍었다.


추석이면 연희가 한 소쿠리 삶아와서 과도로 깎아주던 밤맛이었다.


‘광채 안 나도 맛있네.’


최근에 밤고구마 부처를 죽였는데 요즘 부처 킬링율이 상승세에 있다.


내가 아는 것에 발목 잡히지 말자고 또 또 또 다짐해 보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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