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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Nov 22. 2023

포멜로




포멜로는 향을 먹는 과일이다.


먹기 전에 일단 어깨에 힘을 빼고 콧구멍을 연다. 현대인들의 어깨는 쥐도 새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는 특징이 있고, 딱딱한 어깨는 감각 경험을 한층 재미없게 만들기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일이 우선이다. 


콧구멍 준비를 했으면 포멜로를 두 손으로 안듯이 쥐고 코에 갖다 대 본다. 과일이 꽤 크기 때문이다. 농구공 만한 것도 있다. 


초록 외피는 농장에서 내 손에 이르기까지, 이 포멜로를 한 번이라도 만진 사람들의 손냄새와 본연의 상큼함으로 상쿰(상큼+쿰쿰)하다.


아기 이마처럼 누르는 재미가 있는 이 초록 껍질을 손가락으로 뚫으려 했다간 내부가 뭉개질 수 있으므로 끝이 뾰족한 시카고 스테이크 커틀러리로 상처를 내준다. 좀 더 목적에 합당한 칼이 세상에 있겠지만 우리 집에선 이게 최선이다. 이 지점부터 본격적으로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최초의 상처를 내고자 칼을 집어드는 기분은 붓을 들고 텅 빈 옥당지를 바라볼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극동아시아 지방의 서예는 칼을 쥐고 돌에 새김으로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때 이상할 것 없는 의식의 흐름일지도.


칼 끝이 초록 외피에 닿는 순간 포멜로가 말한다.


'나 사실 자몽이야.'


진짜다. 눈 감고 맡았으면 자몽이다. 그러나 이것도 믿을 게 못 된다. 초록을 지나자 바로 나타나는 하얀 솜사탕 구간에서는 라임향이 나기 때문이다.


통과 구간마다 색색의 시트러스적 노트로 축제가 벌어지는 이 과일은 껍질과 과육 사이가 멀기로도 유명하다. 주먹만 한 과일을 먹자고 볼링공만 한 내피를 다 걷어내고 나면 거실은 귀족적 새그라움으로 빈틈이 없다. 


과일 하나를 이렇게 성대하게 먹을 시간이 있냐고?


있고말고.


어깨에 힘을 빼면 시간이 생기고 모든 과일의 향기가 성대해지는 것이다.

어깨에 힘을 주면 몸과 마음이 딱딱하고 매력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포멜로는 사실 향이 강하지 않다.

맡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만 그럴 뿐.


어깨가 부드러운 어린이 시절, 나는 내 코를 통해 지고체험(peak experience)을 종종 했었다.


나는 이제 어깨가 말랑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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