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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13. 2023

피부




지금은 건조기를 쓰지 않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 살던 집에서는 건조기를 돌렸다.


겨울이면 건조기에서 막 꺼낸 뜨끈 보송한 뭉탱이를 꼭 안고 있다가 손에 얻어걸리는 대로 목에도 칭칭 감아보고 양말이라도 툭 떨어지면 그 속의 훈훈함도 놓칠세라 과자 부스러기 주워 먹듯 괜히 신어보고.


훈기는 그 자체로 위안이고 사랑이기에 일상에서 이렇게 마주할 때면 잠시 파고들었다가 흘려보낸다. 따뜻한 커피잔을 괜히 꼭 쥐고 있거나 냄비밥 해서 뚜껑을 열 때도 밥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을 쳐다본다. 그럴 때면 얼굴 모공은 하루 종일 참았던 날숨을 내뱉듯 일제히 ‘하아-'하고, 나는 또 이런 감각을 수신할 수 있는 껍데기가 몸에 붙어 있음이 새삼스럽다.


이런 느낌이 좋다고 해서 '잠시'를 벗어난 범위로 파고들다 보면 훈훈했던 뭉탱이는 짐덩이로, 모공들의 환호가 한숨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므로 휴잉이 발생하기 전에 적당히 놓아준다.




옳지 못한 피부 자극에 민감한 탓에 라벨, 태그 붙어있는 옷이 없다. 사자마자 크래프트용 칼로 샥샥샥 원래 아무것도 안 붙어 있던 옷처럼 만들고 나서야 옷장에 걸릴 수 있다.


몸에 붙는 옷은 특정 액티비티 용도를 제외하곤 다 탈락이다. 특히 가슴이나 배가 쫄리는 옷은 입지 않는다. 청바지는 예쁘니까 아직 미련을 못 버려서 옷장에 많지만, 마지막으로 입은 지 3년 정도 되었다.  


인체의 가장 큰 장기인 피부.

몸속 가득 피와 뼈를 얼마나 꽁꽁 잘 싸매놨는지... 구석구석 차별화 된 마감재로 이렇게나 예술적으로 발라놓은 모습을 보노라면 대자연을 대할 때처럼 입을 꾸욱 다물게 된다. 그래서 바디로션을 극진하게 안 발라줄 수가 없는 것이다.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가 숙소에서 바디로션 바르는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이 역시 별나 빠졌다며 혀를 내두르던 기억이 난다.




어제는 종이에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 조그만 틈새로 피가 바로 맺히는 걸 보며 피부가 매 찰나 나를 보호하고 있었음을 목도했다. 마치 내가 여태 안 죽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이 나를 위해 몰래 기도해 줬던 모든 이들의 덕인 것 - 나는 그렇게 믿고 산다 - 처럼 평소에는 잘 생각지도 않다가 잃어봐야 알게 되는 많은 것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예전만큼의 탄력이 없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그간의 노고가 보이는구나. 앞으로 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팽팽하든 쭈굴하든 아무 상관없어. 나는 니 덕에 참 많이 누렸거든.


앞으로도 바디로션 잘 발라줄게.

짧은 근황 쿠키글

어제 올해 마지막 패들링을 갔어요. 자세 교정을 위해서 매번 영상을 찍는데 새카맣게 탄 피부에 치는 물결이 아름다웠어요. 저 무늬로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마져 올라왔지 뭐예요. 그치만 피부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참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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