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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손

by ACCIGRAPHY Jan 23. 2025
'무엇'을 쓸까를 미리 염두하지 않고, 텅 빈 손으로 자꾸 쓰다 보면 비로소 나오는 것이 '무엇'이다.


붓을 잡기 전에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더 정확히는 '잘'쓰겠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다. '잘'을 떠올리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글씨에 생명이 달아난다. 근원과 단절된다. 깊은숨을 내쉬며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만들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켜 본다. 손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리듬이 형성된다. 이제 생각은 없고 붓만 움직인다.


오늘은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쓰던 버릇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이렇게 쓰다 보니 몸이 살짝 뒤틀려버렸다. 샤워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는데 오른손과 왼손이 허벅지에 닿는 위치가 달라서 알게 되었다. 더 심한 비대칭이 되기 전에 의식적으로 바꿔 보기로 했다. 작지만 새로운 시도이기에 전혀 작지가 않다.


왼손의 지지를 잃은 오른손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자유롭다. 획이 크건 작건 갈 때 가고, 설 때 서면 되는데, 세필을 할 때 괜히 겁먹고 왼손의 지지에 필요 이상으로 기대어왔다. 갈 때는 시원하게, 설 때는 단호하게 멈춘다.


작년 초부터 역에 꽂혀있다.


누가 들어도 다 아는 진부한 말들로 가득해서 볼 때마다 신선하다. 뻔한 말들의 생기가 일상에 번진다. 달리기 하면서 펼쳐지는 풍경이, 남편의 말투가, 요리할 때 만져지는 식재료들의 감촉이 괘와 효로 변환된다.


역을 접하게 되면서 붓의 움직임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명을 움직여 나가는 것(운명)과 붓을 움직여 나가는 것(운필)이 막연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막연함을 해석할 도구가 하나 더 생겼다.


올해는 또 어떤 유무형의 도구들에 꽂히게 될지 궁금하다. 내 몸에서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흘러나올지,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올지, 오고 가는 와중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떤 발버둥, 혹은 내려놓음을 거쳐야 '무엇'에 닿게 될지.




주역 상경의 수천수(기다림), 산수몽(몽매함) 내용 중 일부. ACCI CALLIGRAPHY 2025주역 상경의 수천수(기다림), 산수몽(몽매함) 내용 중 일부. ACCI CALLIGRAPH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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