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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쓰러 가는 날

미국에서 맞은 설날

by ACCIGRAPHY Feb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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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가로줄인데 이 줄은 두껍고 이 줄은 더 길고 그런 거예요?"


아홉 살 정도의 어린이. 너무나도 훌륭한 질문이었다.


"니 이름이 윌리엄이라고 말한 순간, 나는 니 목소리가 허공에 만든 이미지를 선으로 긋는 거야. 그래서 나도 몰라 내가 왜 그렇게 줄을 그었는지. 니 이름이 지닌 소리, 너의 목소리, 그리고 내 손이 같이 그린 거지."


아이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글씨를 받아 들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자기도 창작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어제는 헌팅턴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 Art Museum and Botanical Gardens)에서 글씨를 썼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남편이 자주 데리고 가던 곳인데, 미국에 세 권 있는 구텐베르크 성경 피지 인쇄본이 있어서 한 번씩 보러 갔다가 카페에서 일기를 쓰곤 했다. 당시 일기장을 보면 미국에서 먹고 살 궁리의 흔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중에 '언젠가 여기서도 글씨를 쓰고 싶다!'고 적혀 있는 걸 보고 웃음이 났다.


헌팅턴도서관이 설날을 기념하여 동아시아 지역 재외공관을 초대한 자리였다. 한국 부스를 꾸려야 하는 전 직장 동료의 요청으로 남편이랑 맷도 함께 갔다. 도서관 정원에서 하루종일 글씨를 쓰는데, 무더운 날씨와 인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재밌어서 또 무리를 하고 말았다.


우연히 글씨를 받아간 한 도서관 직원이 뮤지엄에, 스토어에, 공연장에 소문을 내는 바람에 신기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자꾸 내 앞에 나타났다. 글씨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볼 일 없었던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계속 이야기하며 쓰다 보니 소형 캔버스 200개가 어느새 소진되었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자중해야 함을 또 망각하고, 막판에 욕심이 나서 커다란 캔버스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옆에 중국 부스가 있어서 유려한 선들 보다는 판본체가 돋보일 것 같아 판본체로 쓰기 시작했는데, 흥을 누르지 못하고 두 번째 글자부터는 나비체가 흘러나왔다. 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순간 나만 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화려함 보다는 한글의 본질적 측면을 담담하게 보여주면 좋았을 순간이었다. 절제미 생길까 싶어 커피도 끊었는데 별 소용없었다.


정부기관과의 협업은 표현 양식에 제한이 커서 오히려 재밌는 구석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최근 들어서야 이런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이걸 모르고 어렸을 때 거절했던 수많은 기회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 발목 잡는 건 언제나 나의 닫힌 시야였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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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 Ishizuka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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