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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로운 나날들

生生

by ACCIGRAPHY Feb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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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소리


먹이 말했다.

살살 쥐고 물 위에서 굴리기만 해도 충분히 검고 아름다운 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뭐가 급해서 사정없이 그렇게 눌러 갈아버리니 나는 물과 곱게 섞이기를 거부하겠다. 나는 니가 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할 수 없었다. 다시 갈았다. 글씨를 빨리 쓰고 싶은 마음이,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조급함은 만악의 뿌리임을 먹이 또 다시 새삼스레 알려준다.


급히 갈린 먹마저도 옥당지는 마치 연먹처럼 부드럽게 표현하는 반면 기계지는 얄짤없다. 먹은 먹이요, 물은 물인 경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막무가내 품어주는 종이를 멀리하고 가차 없는 종이로 갈아 탈 시간이다. 힘이 생겼다. 힘들면 언제든지 옥당지한테 가면 되니까 힘 많을 땐 고강도 훈련.


-


여기가 거기


또, 또, 또 뭔가를 잘해보려 하는 고질병이 도진 순간,

불급을 채우는 움직임이 태과로 넘어가는 순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이걸 해서 뭘 이루고 도달하려는 게 아니란 걸 수 백번 깨달았는데도 또 까먹는구나. 여기가 이미 니가 가고 싶어 하는 거긴데. 니가 지금 쓰는 행위 자체가 다인데. 이제 정말로 알았다고 수 백번 인가했는데 또 까먹는구나. 내가 진실로 여기 있을 수 있을 때, 이미 나는 거기 있는데. It's not about getting somewhere with this achievement or creation, ME DOING THIS, IS ENUFF. HERE ALREADY IS THERE. THIS IS EVERYTHING. I'M THERE WHEN I'M TRULY HERE.'


-


세모로이


줄 맞춰 뭘 하는 행위를 안 좋아해서 평생을 맛집에 줄도 안 서보고 글씨도 줄 맞춰 안 썼는데 요즘은 줄 맞춰 쓰는 게 재밌다.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라 기록해 본다. '재밌다'고 느낀 것들은 그 시절의 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글은 알수록 오묘한 문자라는 게 역易을 들여다볼수록 드러난다.


무엇보다 예쁘다.

귀엽기도 하고.


세상에 예쁘고 귀여운 것 만한 공헌도 잘 없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걸 만드신 바람에 오래도 갖고 놀았는데, 늙어가면서 더 재밌게 갖고 놀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감사하다.


세모(반치음)는 이제 없어졌지만 한글의 구성 원리에서 '인간'을 표현했기에, 그리고 너무 귀여우니깐 그득그득 오려 붙였다. 하늘(이응)과 땅(미음)을 잇는 인간, 세모가 사라진 것에 시대상이 보이는 것 같아 이것도 오묘하다. 공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인간들이 서로 사랑할 줄 모르면 지구에 인간이 없는 거라 했다. 각기 인의예지와 이데아로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사랑.


그래서 오늘도 세모로이 살아보려고 내 글씨와 사랑에 빠지고 달리기와 사랑에 빠지고, 미트볼파스타와 사랑에 빠진 남편 먹이려고 고기를 갈았다. 냉동 미트볼을 사 올 수도 있지만 고기를 갈아서 세모로이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쓰고쓰고
오리고오리고
테트리스하고테트리스하고
붙인다. (회복을 뜻하는 '지뢰복‘괘를 테트리스로 표현하는 중. 아직 작품명 미정)붙인다. (회복을 뜻하는 '지뢰복‘괘를 테트리스로 표현하는 중. 아직 작품명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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