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만난 날
'작은 마음' 꿈을 꾼 후로 작은 글씨를 쓰고 있다. 작은 글씨는 큰 집중을 요하기에, 큰 글씨 보다 눈에 더 꽉 차는 맛이 있는 반면, 쓰다 보면 금세 배가 고파진다는 단점이 있다. 쓰는 행위 자체의 희열로 잠시 허기를 잊기도 하지만, 결국 배고픔은 밥으로 채우고, 다시 붓을 잡는다.
작은 글씨는 나비체로 쓰면 재밌다. 물론 큰 글씨도 재밌지만 스타일 자체가 화려해서 크기라도 작아야 매력이 제대로 드러난다. 처음으로 만든 글씨체이기도 하고, 어릴 때 만들었지만 한동안 등한시해 온 스타일로, 최근 몇 년간은 직각, 예각, 동그라미 같은 똑 떨어지는 한글 모양에 꽂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얼마 전 '작은 마음'에 대한 꿈을 꾸고 나서 나의 첫 글씨체를 새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비체는 추위를 이겨내려는 몸짓에서 나왔다. 길에서 글씨를 쓰다가 손목이 얼어서 잘 돌아가지 않아 가로 세로로 8자를 그리며 손목을 풀던 중에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는데, 모음이 먼저 나왔고, 8자의 흐름과 모음의 모티브는 다음과 같다.
세로와 가로의 8 상태에서 '그림자'를 지우면 세로 가로의 모음 모티브가 나온다. 여기서의 그림자는 수렴되는 움직임, 즉 나가는 선과 돌아오는 선 중에 후자를 말한다. 그래서 결국 내 눈에는 다 8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이 모티브 위에 점차 획들이 추가된다.
이런 식으로 모든 모음에 획들이 추가되고 쌓여감에 따라 엄마를 닮은 자음도 따라 나왔다. 자음의 뿌리는 한글 서예를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익혔던 '꽃뜰 이미경체'에 있지만, 내 글씨를 써 온 시간과 나비체의 모음이 만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강조되고 디테일이 생략되는 흐름으로 변형되었다.
2004년 작업 사진의 원본을 찾을 수가 없어 화질이 안타깝지만, 최근 글씨에 비해 더 날 것이고, 힘이 있으면서 제멋대로인 반면, 최근 글씨는 나도 미처 몰랐던 나비체의 원형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비체의 본명은 나비글씨다. 단순히 글씨체로만 부르기엔 나비가 할 말이 많아 보여서 나비가 쓰는 글씨라는 의미에서 나비글씨라고 불렀는데, 이걸 매번 설명하자니 나와 남에게 못할 짓 같아, 그냥 '체'라고 부른다.
추위를 이겨내려는 몸짓이 일으킨 하나의 글씨체는 다른 글씨들이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보여주었다. 추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게 아닌, 추워도 너무 재밌어서 안 할 수 없는 자리를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었고, 구원받았다.
하늘은 나의 시작,
나비는 내 첫 글씨체이자 처음으로 사랑했던 철학자,
박지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이름.
이렇게 너무 내 것이라 돌아보지 않았던 작은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다음엔 저 작은 낙관을 만들어주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나비체가 만들어진 날이 궁금하신 분: https://brunch.co.kr/@acci-graphy/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