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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글씨

나비를 만난 날

by ACCIGRAPHY






'작은 마음' 꿈을 꾼 후로 작은 글씨를 쓰고 있다. 작은 글씨는 큰 집중을 요하기에, 큰 글씨 보다 눈에 더 꽉 차는 맛이 있는 반면, 쓰다 보면 금세 배가 고파진다는 단점이 있다. 쓰는 행위 자체의 희열로 잠시 허기를 잊기도 하지만, 결국 배고픔은 밥으로 채우고, 다시 붓을 잡는다.


작은 글씨는 나비체로 쓰면 재밌다. 물론 큰 글씨도 재밌지만 스타일 자체가 화려해서 크기라도 작아야 매력이 제대로 드러난다. 처음으로 만든 글씨체이기도 하고, 어릴 때 만들었지만 한동안 등한시해 온 스타일로, 최근 몇 년간은 직각, 예각, 동그라미 같은 똑 떨어지는 한글 모양에 꽂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얼마 전 '작은 마음'에 대한 꿈을 꾸고 나서 나의 첫 글씨체를 새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비체는 추위를 이겨내려는 몸짓에서 나왔다. 길에서 글씨를 쓰다가 손목이 얼어서 잘 돌아가지 않아 가로 세로로 8자를 그리며 손목을 풀던 중에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는데, 모음이 먼저 나왔고, 8자의 흐름과 모음의 모티브는 다음과 같다.


왼쪽부터 세로8, 가로8, 세로 모음 모티브, 가로 모음 모티브.


세로와 가로의 8 상태에서 '그림자'를 지우면 세로 가로의 모음 모티브가 나온다. 여기서의 그림자는 수렴되는 움직임, 즉 나가는 선과 돌아오는 선 중에 후자를 말한다. 그래서 결국 내 눈에는 다 8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이 모티브 위에 점차 획들이 추가된다.


ㅏ, ㅑ, ㅓ, ㅕ


이런 식으로 모든 모음에 획들이 추가되고 쌓여감에 따라 엄마를 닮은 자음도 따라 나왔다. 자음의 뿌리는 한글 서예를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익혔던 '꽃뜰 이미경체'에 있지만, 내 글씨를 써 온 시간과 나비체의 모음이 만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강조되고 디테일이 생략되는 흐름으로 변형되었다.

ㄱ, ㄹ, ㅁ, ㅅ의 나비체 예시. 붙는 모음에 따라 각도나 모양이 조금씩 변형된다


나비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던 작업 (YG Entertainment, 2004)


최근에 나비체로 쓴 <중용> 일부 발췌 및 각색 ACCI CALLIGRAPHY 2025


2004년 작업 사진의 원본을 찾을 수가 없어 화질이 안타깝지만, 최근 글씨에 비해 더 날 것이고, 힘이 있으면서 제멋대로인 반면, 최근 글씨는 나도 미처 몰랐던 나비체의 원형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비체의 본명은 나비글씨다. 단순히 글씨체로만 부르기엔 나비가 할 말이 많아 보여서 나비가 쓰는 글씨라는 의미에서 나비글씨라고 불렀는데, 이걸 매번 설명하자니 나와 남에게 못할 짓 같아, 그냥 '체'라고 부른다.


추위를 이겨내려는 몸짓이 일으킨 하나의 글씨체는 다른 글씨들이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보여주었다. 추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게 아닌, 추워도 너무 재밌어서 안 할 수 없는 자리를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었고, 구원받았다.


하늘, 나비, 박지영. 내 호號와 이름


하늘은 나의 시작,

나비는 내 첫 글씨체이자 처음으로 사랑했던 철학자,

박지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이름.


이렇게 너무 내 것이라 돌아보지 않았던 작은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다음엔 저 작은 낙관을 만들어주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나비체가 만들어진 날이 궁금하신 분: https://brunch.co.kr/@acci-graphy/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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