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無所住而生基心
"손으로 찍지 말고 낙관을 해야지. 그게 서예야. 글씨 실컷 잘 써놓고 왜 손으로 찍어."
귀엽고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안타까워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자글자글한 주름이 나로 인해 실시간으로 더 자글해지고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저는 서예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글씨 쓰는 거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돌도장보다 손도장이 저는 좋아요.”
그때의 나는 그랬다. 생글생글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굽힐 줄 모르는 사람. 남의 말 콧등으로도 안 듣는 사람.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흉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물론 살다 보면 남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 순간도 많지만).
"저기 밑에 있는 전각집에 시간 있을 때 놀러 와. 학생이니까 내가 그냥 만들어 줄게. 꼭 와! 알았지?"
"예."
오직 대화를 종료하기 위한 대답일 뿐, 나는 할아버지 전각집에 내 발로 가 볼 생각이 없었다.
인사동에 가는 주말마다 할아버지는 내가 앉아있는 돌에 찾아오셨고, 그때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주름을 더 패이게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하루는 어떤 결단을 하셨는지 인자한 표정을 거둔 채 말씀하셨다.
"한글이 좋아? 한자가 좋아? 호가 있어?"
나도 이쯤 되니 할아버지를 해방시켜 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대답에 나섰다.
"한글이 좋죠. 호는 '하늘', '나비'예요."
"큰 게 좋아 작은 게 좋아? 평소 작업 사이즈가 어떻게 돼?"
"맨날 이 정도 사이즈의 옥당지에 써요. 작은 게 좋아요."
할아버지는 필요한 정보를 얻자마자 자리에서 사라지셨고, 나는 한동안 인사동에 가지 않았다.
-
오랜만에 찾은 인사동 초입 돌판 위에는 은행잎이 한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 펴는 걸 보고 크라운베이커리 언니가 뛰쳐나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요즘 날씨 너무 좋은데 왜 안 오나 궁금했어."
오랜만의 인사동은 여전히 좋았다. 은행잎이 우수수 종이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글씨를 쓰다 허리를 잠시 폈는데, 앞에 전각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보통 한자로 작업하다 보니 한글은 오랜만이라 어떨지 모르겠어."
할아버지의 한글 전각은 곧고 꾸밈이 없었다. 주섬주섬 하나씩 꺼내 보여주시며, 이건 왜 음각이고 양각이고 크기가 어떻고 설명을 하시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이걸 주려고 헛걸음을 쳤을지도 모를 여러 번의 주말을 상상해 버렸다. 순간, 사무치게 미안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예뻐요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평생 간직하면서 잘 쓸게요."
할아버지는 숙원 사업을 이뤄낸 사람처럼 시원하게 웃었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내 손도장을 향한 고집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돌로 만든 낙관보다 '내 손가락무늬가 더 참된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공고함은 내 세계를 구축했지만, 이내 나를 가두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었던 한 사람의 꾸준한 진심에는 커다란 힘이 있었고, 결국 그 힘은 나를 낙관하는 방식으로부터 해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