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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흔적

by 여러 이상한 헛소리 Mar 18. 2025

  난 내가 살아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지. 처음 동화책을 봤을 때, 나도 이런 걸 만들어서, 뻗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내게 멋진 인생이란, 그런 영역이었어.


  그런 나라서 그런 걸까? 아주 무서운 마음으로 시청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어. 이젠 정말 예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현대의 한 인간이 지구를 얼마나 오염시키는지 알려주는 내용이었지.


  그건 “당신은 평생 ○○ 쓰레기를 △△개 남길 겁니다. 그 쓰레기가 썩어 없어지려면 ▼▼년이 필요하죠.” 식이었어. 지금이야 그나마 익숙해진 메시지지만, 어린 마음으론 너무 무서웠지.


  하지만 난 그걸 계속 보고 있었어. 마침 좋아하는 만화가 끝나기도 했지만, 다큐멘터리도 좋아하는 아이였거든. 물론 세계의 동식물이 나오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난 그 두려움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어. 이 두려움을 조금만 참으면, 반드시 뭔가 좋은 걸 얻을 거라 확신했거든. 지겹지만 진지한 책을 끝까지 읽는 거나, 심해 탐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똥을 일부러 참아 보는 것처럼, 일종의 배덕감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때의 나도 세상엔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자랑거리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 말이야.


  난 두 가지 지식에 모두 매료되어 있었어. 전자는 전자대로 후자는 후자대로 좋았지. 어떤 지식이든 흡수해 보는 시기였어. 누군가는 내가 일관적으로 학구적이기에 좋아했고, 누군가는 내 속이 음침한 걸 알고, 싫어했던 기억이 나.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당연히 이 다큐멘터리는 후자였어. 내겐 좀 신선한 충격이었지. 그렇게까지 공공연하게 불편한 지식을 알려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 다큐멘터리는 그렇게까지 음침하지도 않았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를 해석하고 있었지. 그 덕에 시청자를 선명하게 불편하게 하는 거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수치들이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네)


  난 그 방대한 수치에 점점 빠져들었어. 뭔가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진다고 느꼈거든. 그건, 사람들의 모순과 약점을 들쑤시고 있는 거잖아! 그런 건 놓칠 수 없지. 정말 희한한 사고방식이야. TV는 분명, 생각 없이 채널이나 돌리라고 만든 거일 텐데.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이런 식으로 장식되었어. “우리는 세상에 자신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려 합니다. 본능적으로는 자식을 남기고, 의식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업적에 관심이 가죠. 자신이 죽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란 생각에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한 명 한 명이 지구에 남기는 진~한 오염도장들을 생각한다면,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네요.”


  워낙 오래전에 본 내용이라 문구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한참 탄소발자국 개념을 사용하던 시기니까, 대충 이런 식이었을 거야. 마무리 멘트를 들은 난, 짜릿했지. 동시에 매우 무서웠어. 나만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게 아니라는 게, 좋고도 불편했던 것 같아. 그때도 자신이 너무 게으르단 건 알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이냐면, 나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작품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는 거야. 게으른 나는, 그걸 쉽게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 물론,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걸 목표로 하는 거라면, 난 게으른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거야. ㅎㅎㅎㅎ 게다가 그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이게, 이미 내가 희망했던 방식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웃고 있었어! 내 오만과 나태의 못된 얼굴을 확인한 거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어. 게다가, 그런 자동적인 시스템에 저항할 수 없는 방식이지. 우린 자동차 없이 살 수 있을까? 안 될 건 없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한 수준에 와있는걸. 다큐멘터리를 봤던 때에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어.


  요즘도 가끔,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그 다큐멘터리를 본 날이 생각나. 물론 난 좀 있어 보이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거지만,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이런 의문보다 짜증 나는 건, 어느새 그 의문을 핑계로 게을러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흔적과 욕망과 지식……. 총체적 난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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