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적하고 큰 그을린 얼굴에 크고 부리부리한 눈, 오뚝하고 큰 코와 크고 두터운 입술. 짙은 눈썹, 하얗게 샌 머리에 180cm는 족히 넘을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가지셨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네를 지팡이 하나를 한 손에 쥐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약간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걸어오신다.
이 동네 최고령 할아버지다.
정확한 연세는 잘 알지 못하지만 족히 90은 넘어 보인다. 그런데도 아직 정정한 걸음걸이와 화통하게 큰 목소리에서 강직한 면이 엿보인다. 어릴 적 동네에서 씨름 대회를 하면 빠지지 않고 나갈 만큼 힘도, 운동신경도, 남달랐다.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가서 이 동네를 잠시 떠났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동네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 아닐 수 없다.
20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작디작은 키에 왜소한 외모를 가진, 자신과 정 반대로 대비되는 조용한 성격의 동네의 여자와 결혼하여 5남매를 낳았다. 그때 당시 이 동네에는 논과 밭이 많았는데, 그 논 중에 하나를 가지고 벼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농사를 짓는 농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글을 잘 읽고 쓸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운 한문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할아버지는 한문이 많이 섞여서 쓰이던 시절에, 까막눈으로 한문을 읽지 못하는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찾아와 편지와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대필까지 해 주셨던 실력 있는 분이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이장역할도 하게 되었다. 꽤 어린 나이에 시작한 동네의 이장역할은 할아버지가 꽤 많은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 동네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논과 밭이 많았던 동네에 새로운 주택들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하고, 재개발이 되면서, 동네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더 이상 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평생 직업이 되어준 터전인 논을 팔아 그 돈으로 노후생활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여 동네를 떠난 후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자신의 오래된 작은 주택에서 아내와 함께 적은 살림이지만 밥을 함께 나눠먹으며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늘 동네 골목을 한 바퀴 도는 게 일상이 된 할아버지였다. 이장 시절부터 매번 하던 일이었는데, 이장 직을 내려놓고도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일은 계속되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당당하게 걸어서 골목을 지나간다. 그러면 지나가던 동네 분들이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며 반갑게 할아버지의 안부와 건강을 묻는다.
"오늘은 어떠세요?"
할아버지는 당당하게 지팡이가 없는 한 손을 흔들어 응수하거나 악수를 건네며 반가워한다.
"나는 아직도 젊다네."
그러면 동네 어른들은 듬직하고 화통한 최고령 어르신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또한, 아이들이 몰려와 할아버지께 인사를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주머니 안쪽에 넣어둔 박하사탕을 한두 개 꺼내 아이들 손에 쥐어 주며 말한다.
"공부 잘하지?"
할아버지가 지치거나 당이 떨어지면 먹는 소중한 박하사탕이다. 유일한 할아버지의 간식인 것이다.
달콤 쌉싸름하고, 매운맛을 내며, 입과 귀를 시원하게 만드는 박하사탕을 처음 먹어 보는 아이들은 오묘한 맛을 느끼며 할아버지의 시원하고 다정한 모습에 쓰며 든다.
그런 할아버지 옆에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면, 노을이 지기 전, 저녁 먹기 전, 가게 앞 평상에서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옛적에 흥부와 놀부가 살았는데. 흥부는 가난했지만 마음이 따뜻했고, 놀부는 부자였지만 욕심쟁이였어. 두 사람은 형제였는데..."
아이들은 옛날이야기는 물론, 전래 동화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시원하고 화통한 목소리는 이야기와 함께, 동네 골목에 울려 퍼지며 동네에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동네의 큰 어르신인 할아버지도 몇 년 전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던 아내와 사별하게 되었다.
처음이었다. 큰 폭설이 내리거나 장마가 크게 내리는 위험한 날이 아니고서는 때론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코트를 입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네를 한 바퀴 도시던 할아버지다.
아내와 사별한 후, 그다음 날, 또 다음날도, 또 또 다음날도,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도 당당하게 동네를 누비는 할아버지 모습을 볼 수 없자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 집을 찾아갔다. 할아버지를 보러 간 동네 사람들은 한없이 야위어 쓸쓸하게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많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동네 큰 어르신을 잃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반찬과 밥, 그리고 국을 해오기 시작했다.
아내를 잃고 꽤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얼마 후, 자식들이 있는 다른 곳에 가서 살게 되어 이 동네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동네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자 할아버지가 동네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나는 이 동네에 남아 있기로 했네."
동네 반장이 할아버지의 끼니를 맡아서 계속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자 동네를 한 바퀴 도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골목에서 할아버지가 느지막하게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돈다. 그러면, 예전보다 많이 야윈 할아버지지만, 그래도 건장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그러나 꽤 당당하게 걸음을 유지하며 지팡이를 들고 골목을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직도 변하지 않은 당찬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동네 어귀에서 들려온다.
마치 동네를 깨우는, 인사를 받고 인사를 하는, 할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동네에 메아리치며 확성기처럼 동네 곳곳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