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의 존재인 자들이 행한 주제를 모르는 사악한 변태적 교만에 대한 형벌은 지옥행이라도 가벼운 것에 속한다. 공의의 존재인 우리는 우리의 공의에 따라 저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사랑의 존재다. 또 인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에게서 난 우리의 자식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공의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구할 사랑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사랑의 모조품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 부모가 어찌 자식을 버리겠는가? 자식이 죄를 지었다 하여 자식이 아니겠는가? 그 죄로 자식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놓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단지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모조 품도 그러한데 우리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신이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그 원수 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절대적 수치의 오욕을 감당하고서라도 아이들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을 향한 용서라는 말은 사실 우리에게 필요도 없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짓건 그것은 문제도 아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아이들은 죄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러니 용서라는 말은 던져두자. 사실 우리 부모들은 용서라는 말은 꺼낼 필요도 없다. 사실 아이들이 중요하지 아이들의 잘못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용서는 애초에 언급조차 않아도 된다. 그것은 마치 봄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을 견디고 꽃 눈을 지키기 위해 온 겨울을 싸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다. 꽃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식을 꽃피우는 어미의 심정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빨리 아이들을 구하자.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 우리의 배신감이나 그 무엇보다 우선인 것이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뱀에게 납치되었다. 아이들을 구해내자. 우리들은 급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의 죄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않는다. 우선 뱀 이놈의 죄를 물고 늘어져 이놈에게 아이들을 건져낼 정밀하고도 완전한 판결을 내리자. 그래서 이놈 뱀에게 내리는 판결로 아이들을 구할 길을 열자.
우리는 뱀에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너는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게 될 것이다"
이 말에 숨겨진 우리의 의도는 이 놈 뱀이 범죄로 죽은 자들의 영혼만을 간섭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범죄 하지 않은 자들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들이니 흙이 아닌 자들을 뱀이 삼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범죄 한 아이들도 합법적으로 용서받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면 뱀이 만지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뱀의 다리를 없앴다. 뱀의 능력을 줄여 네 발로 뛰어 아이들을 공격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말에 숨겨진 의도는 아이들과 이놈 뱀을 원수로 만들어서 결국 원수인 이놈과 아이들이 결코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놈 뱀의 머리를 깨뜨려 결국 이놈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으므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식물을 먹게 될 것이다. 너는 흙에서 취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에게는 벌처럼 말했지만 그에게는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만물이 그를 버려 굶겨 죽일 것이 두려워 그가 합법적으로 타락한 만물에게서 양식을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아담이 반역했기 때문에 그에게 속했던 만물도 반역을 일으킬 것이었다. 사자나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었다. 그리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었다. 결코 아담에게 순종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담은 이 세상에서 살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땀을 흘리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땀을 흘려 일해야 하는 것이 에덴에서와는 다른 형벌이었지만 에덴에서 쫓겨나 만물의 반격에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판결은 형벌을 가장한 축북이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고, 네 소원은 네 남편에게 있으나 그는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여자에게는 형벌처럼 말했지만 우리는 여자가 출산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먼 훗날 내가 가려면 여자가 출산하는 것은 꼭 필요했다. 내가 여자의 몸을 통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정한 때에 가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뱀의 머리를 깨고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이 편파적이라 말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납치되었는데 무엇이 편파적이란 말인가? 납치범인 뱀과 아이들을 같이 두고 보는 것이 어떻게 공평한 것인가? 그것은 공평이 아니다.
또 우리의 판결을 불법이라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결은 사랑에 치우쳤으나 공의에는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공의에 따라 받을 벌은 동일하게 아이들에게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사형이었다(창 2:17) 단지 그 사형 집행을 아이들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신당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공의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스토리에서 아이들이 해야 할 것은 나를 믿는 것이었다. 믿기만 하면 용서와 구원이 동시에 주어지고 원래의 만물의 영장의 지위가 회복된다. 단지 첫 아담에게 속한 세상 속에서 잠시 고단한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인간이 이 구원의 메타내러티브에서 한 것이라고는 사악한 반역과 믿는다는 입술의 고백뿐인 것이다. 그래도 잠시 자신들이 망쳐놓은 세상에 있는 것도 불평한다면 그는 아마 진정 회심하고 구원받은 인간은 아닐 것이다. 회심하고 구원받은 인간은 성령이 안에 있어 모든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그런 어리석은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했기에 사실 죽는다는 판결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사실 죽는다 해도 살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판결을 내릴 때에는 죽는다는 사형판결에 대해 언급을 안 했다. 뱀에게는 저주를 내렸지만 아이들에게는 저주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물론 아이 때문에 땅이 저주는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형벌을 받고 저주를 받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도 그것을 최대한 늦추고 또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그 저주가 일어나기 전에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나의 아이야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단지 네가 사는 것이다. 너는 내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데 너는 자꾸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가 없구나.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모든 만물을 허락하고 동산 나무의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런데 너는 단 하나 선악과를 선택했다. 사실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인데 세상 모든 자유를 버리고 반역을 택하다니 알 수가 없다. 구약에는 너희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법을 알려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내가 억지로 시키는 규정들로 여기고 또 대들더구나. 삐뚤어지고 병든 마음과 그 마음으로 행한 모든 악행은 내가 짊어질 테니 너는 속히 나에게 오너라.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나는 너를 지키는 자다. 너를 사랑하는 유일한 자다. 너의 발을 지키고 너의 길에 등불이 되어 네가 칠흑 같은 어둠에 있더라도 내 살을 찢어 피로 너를 씻어 건져낼 것이다. 아이야 살아라. 아이야 살아라. 살아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야 그곳, 에덴으로 다시 가 너의 상한 발을 씻기고 너의 상처 난 곳을 싸매어주마. 아이야 어서 일어나 나와 함께 새 에덴, 새 예루살렘으로 가자. 그곳에는 눈물이 없단다. 그곳에는 죽음이 없단다. 그곳에는 다시 사자가 어린양과 뛰어논단다. 너는 사자와 늑대를 타고 다시 들판을 달릴 거란다"
"내 새끼야 그곳으로 가자"
"그곳, 그곳으로 함께 가자"
"집에 가 나랑 다시 살자"
"내 새끼야"
"아프면 안 된다. 죽지도 마라"
"나랑 꼭 살아 돌아가자"
"살아라, 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