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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각

행복 에세이

by 한결

[에세이] 노각

한결


입추를 맞이하고 말복이 지나 여름의 막바지, 처서를 코 앞두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선선해졌으니 더위가 한 풀 꺾인듯 보여도 한낮은 여전히 덥다. 올 해 여름은 예년과는 다른 차원의 더위가 기승을 부려 꽤 애를 먹었다. 추위보다는 더위가 낫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도 부대낄 정도니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곤욕이었을 것이다.


안은 에어컨, 밖은 태양 사이에서 시소게임을 하다보면 땀이 흥건하다 시원했다가 급작스런 기온의 변화에 냉방병이 걸리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여름보양식을 찾게 마련인데 우리가 즐겨먹는 여름 보양식으로는 삼계탕이나 추어탕 등 많은 음식이 있고, 냉면, 냉 모밀, 냉 칼국수 등 시원한 음식도 많다. 그러나 이 음식 들은 평상 시 자주 먹기도 하거니와 삼시 세끼 모두 사먹을 수도 없기에 달아난 입맛을 돌리기는 역부족이다. 특히 저녁에는 아무리 기온이 내려갔다고는 하나 특히 입맛이 확 떨어졌을 때는 밖으로 나가는 것도 짐이다. 그럴 때 먹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하나 있는데 바로 노각 무침이다. 노각은 늙은 오이다. 그것도 아무 오이가 아닌 재래종에게만 허락한 족보 있는 오이인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해마다 늦여름에 꼭 노각으로 무침을 해주셨다. 어린 나이에 싫어할만한 반찬이긴 한데 난 오이를 좋아하는 입맛에 난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았고 매콤한 양념으로 버무린 무침의 맛에 빠져들었다. 노각은 누렇다 못해 껍질이 갈색이 될 정도다. 거기에 주름진 얼굴과 거친 피부는 마치 아무 짝에 쓸모없는 그냥 썪은 듯 버려야할 듯한 외관이다. 그러나 두꺼운 껍질을 깎고 퉁퉁한 속살이 드러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으로 쪼개어 씨앗을 모두 파낸다. 길게 썰어 소금에 살짝 절인 후 물기를 짜고 양념을 하는데 설탕, 고춧가루, 식초, 고추장 등으로 매콤하고 새콤한 맛을 내고 파, 마늘 등 양념을 곁들인다. 아삭 아삭하니 상큼한 오이향과 함께 씹히는 식감이 최고다. 하얀 쌀밥 위에 노각무침을 올려 놓고 한 입 먹으면 더위가 멀리 달아나는 농촌의 밥도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른 오이는 고소하고 신선한 향도 있고 오이 도라지 무침, 오이 냉국에, 오이 소배기에 어울리는 맛이지, 절대로 노각 무침의 물 맛을 따라잡을 수 없다. 노각은 그 안에서 숙성된 물이 나온다. 오랜 기간 여름을 이겨낸 맛,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에만 먹을 수 있는 고향의 맛이며 어머니의 음식인 것이다. 물론 푸른 오이도 노각못지 않게 훌륭한 맛을 낸다. 날 것으로 먹으면 갈증을 해소시키고 무침을 하면 밥반찬, 소금에 절여 양념한 꼬들꼬들한 오이지도 맛나다. 그러나 아무리 싱싱해도 노각의 맛을 낼 수는 없다. 같은 오이지만 나이에 따른 다른 맛, 청년에게 청춘의 힘이 있다면 중년에겐 원숙미가 있듯 각기 다른 맛이 나는 오이 중에서 나는 중년 최고의 맛을 좋아하고 있는 셈이다. 노각은 어떻게 발견했을까. 오이는 푸름이 솟아오를 때 따는게 정설인데 누군가가 오이 따는 시기를 놓치고 나중에 이상하게 생긴 쭈그리한 오이를 보고 아깝다고 씨는 버리고 몸통이라도 먹어보자해서 노각의 맛을 알았을 줄도 모를일이다. 그게 대대로 내려오면서 노각 무침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재래종에서만 노각이 탄생한다 하니 그 옛날부터 K-오이가 전해져 왔다는 뜻이 된다.


시원한 물에 밥을 말았다. 에어컨과 햇볕사이에서 지친 하루, 밥 한 숟가락을 뜨고 노각을 위에 얹는다. 한 입 그득 넣고 우적우적 씹으니 오독오독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압권이다. 다른 찬이 없어도 잘 넘어간다.


노각을 보니 이제 서서히 가을이 오려나보다. 한 여름 내내 푸르렀던 일반 오이를 오래 놓아둔다고 노각이 되진 않는다. 나 또한 노각처럼 점점 늙어가는 나이, 나이가 들면 쓸모없다고 치부되는 세상에서 노인이라면 꼭 아파야하고 생이 얼마남지 녹슨 고물로 대접받는 세상이지만 노각처럼 별미로, 꼭 필요할때 한 몫할 수 있는 맛으로,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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