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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21. 2024

삼전도비에 담긴 소빙하기 이야기

문화유산 지구과학

잠실에 가면 높이 우뚝 선 롯데월드타워가 눈에 띈다. 성공한 한국의 모습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높은 곳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데 딱 알맞은 곳이다. 지난했던 우리의 과거는 아스라하게 그리고 미래는 밝게 만드는 장소다.


삼전도비, 출처: 송파구청


그 건너편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근처에도 우뚝 솟은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이른바 삼전도비(사적 제101호)로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비의 전체의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23m, 너비는 1.4m, 두께는 0.39m이다. 무게는 32톤이다(두산백과).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가 전체 높이 4.48m, 비신의 높이 2.27m 인 것을 보면 삼전도비의 크기가 짐작된다. 인조와 신하들이 당연히 알아서 제일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석 옆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원래 사용할 예정으로 만들었으나 청의 변덕으로 더 큰 것을 만들고 남은 원래사이즈의 비석 받침이라고 한다. 또한 삼전도비의 조각은 조선후기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원래 1639년 12월에 송파나루터(삼전도, 三田渡)에 세워졌는데, 1895년 청일전쟁에서 드디어 청이 지게 될 것을 알게 된 고종이 보기 싫다고 한강(아마도 현재의 석촌호수)에 던져 넣었던 것을 일제가 1917년에 강바닥에서 발굴하여 세워 놓았다. 광복 후 주민들이 다시 땅에 묻었는데 1963년 대홍수로 다시 노출된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1983년 송파대로 확장으로 석촌동 289-3번지에 세워졌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 비석은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문화재보호법 상 규제로  삼전도비 반경 100m 안의 건물 재건축이 어렵다는 민원 때문이라고 한다. 삼전나루 푯돌은 석촌호수 서호의 남서쪽 끝에 있다. 당시에 잠실은 섬이었고 강가였다. 




(좌)비석의 명칭, 출처:한국학중앙연구소, (우)왕의 신도비 중 가장 큰 태조 건원릉의 신도비,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세계정세를 못 읽던 조선은 전쟁 같은 전쟁도 못해보고 남한산성에 숨어 있다가 항복하고 임금(인조)은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하고서야 알량한 나라를 지켰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다. 조선이 친명정책을 버릴 기미가 없음을 알게 된 청태종은 명나라와의 싸움에 앞서 후방을 다스릴 겸해서 조선 침략을 결심했다. 임진왜란 때 은혜를 입었으니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한다는게 당시 조선의 중론이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홍타이지)은 12만 8000명(국방부, 병자호란사)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6일 만에 한양에 다다랐다. 조정은 12월 13일에 청군의 침입을 알았고, 청군이 한양에 근접했던 다음날인 12월 14일에야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 준비 없던 산성에 틀어 박혀서 대신들의 갑론을박만 듣고 있던 인조는 결국 45일 만에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로 나가 항복의 예를 올렸다. 


침략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과 전쟁의 전후를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결국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어차피 치욕스런 글이 될 것을 예상한 문장가들은 다 내뺐으나 결국 종친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비문이 선정되고, 오준(吳竣, 1587~1666)이 글씨를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인조는 제발 나라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이경석에게 쓰게 했다고 한다. 


왜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는가


위에서 청나라의 조선침공을 명나라 침공의 사전 작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더 거시적으로 보면 다른 이야기도 가능하다. 근세 소빙하기(Little Ice Age) 때문이었다. 


기후학계에서는 14세기 초 ~ 18세기 초까지 약 400년 동안은 약 1만 8000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 이후 기후면에서 가장 특이했던 시기라고 본다. 근세 소빙하기로 알려진 이 시기 동안 평균기온이 2℃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잘 얼지 않던 영국의 템스강이 꽁꽁 얼어붙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때 아닌 눈과 서리 등 자연재해가 잇달았다. 특히 북대서양 지역에서 두드러진 이 한파는 유럽 전역에서 기근과 전염병을 초래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지구의 평균온도 변화, source: wikimedia commons by RCraig09


우리나라에서도 이상기후가 이어져 1600년대에는 압록강이 얼어붙는 일이 빈발했다. 인조실록에 "강이 견고히 얼어붙어 평지가 되어 철기가 질풍같이 빠르다"라고 보고되어 있다. 알다시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6일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하루에 90km를 주파한 속도이다. 또한 병자호란 직전의 청나라에도 기근이 들어 귀족들이 먹을 양식만 빼고 모두 시장에 내놓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전 정묘호란 때도 교역을 하자는 것이 청의 주된 요구였는데, 이는 식량이 부족한 청나라 사정 때문이었다. 즉 여진족의 남하는 이상기후에 따른 식량부족이 원인이었다. 물론 이후 조선에서도 식량위기가 심각해져, 병자호란으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에게 1641년 조정은 더는 식량 공급이 어려우니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통보했다. 


매사추세츠대학의 지구과학 교수인 레이몬드든 브래들리(Raymond Bradley) 박사팀은 2021년 소빙하기의 원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북대서양의 해수면 온도가 1380년경에 정점을 찍은 따뜻한 물이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북쪽으로 이동했음을 밝혀냈다. 그 결과 그린란드 남쪽과 북유럽 해역은 평소보다 훨씬 따뜻해졌다. 


일반적으로 대서양에서 따뜻한 물은 열대지방에서 북극으로 항상 이동한다. ‘대서양 대규모 해양순환(Atlantic Meridional Overturning Circulation ; AMOC)’으로 알려진 현상이다. 고위도에 다다른 물은 북극해를 만나 식으면서 밀도가 높아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지구를 순환하는 패턴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전지구적 기온이 유지된다. 


그러나 1300년대 후반에 AMOC는 크게 강화되어 평소보다 따뜻한 물이 훨씬 더 많이 북쪽으로 이동했는데, 그로 인해 북극 얼음이 급속히 손실됐다. 1300년대 후반과 1400년대에 걸쳐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양의 얼음이 북대서양으로 녹아내리면서 해당 수역을 냉각시키고 염도가 희석되자 결국 AMOC가 붕괴됐다. 결과적으로 육지의 온도는 떨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18세기 초까지 이상기후 현상이 빈발하게 되었다. 저자들은 따뜻한 물의 과다발생의 원인으로 당시의 비정상적인 태양 활동을 들고 있다. 


삼전도비의 재질


비석의 재질은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이다. 대리석은 회백색의 세립질 대리석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비석은 충주에서 떠왔고, 귀대는 과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숭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 (1683) 8월 16일). 1637년 8월에 캐낸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을 가져오기 위해 400여 명의 군사가 동원됐는데 장맛비가 내리지 않아 배를 띄울 강물이 말라 결국 1639년 봄에야 간신히 옮겼다고 한다. 지질학적으로는 충주지방에 노출된 향산리 돌로마이트질 석회암, 계명산층과 문주리층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2007년 2월 7일 백 모 씨는 삼전도비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철거 병자 370'이라고 쓰는 테러를 저질렀다. 그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녀 감옥살이를 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백 씨가 써놓은 낙서를 지우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시험을 실시했다. 그중 암석의 균열발달 정도와 풍화정도를 추정하기 위해서 초음파속도를 측정하였다. 아래 그림은 당시 실시한 초음파 속도측정을 2D 모델링으로 표시한 결과이다. 초음파는 암석을 통과할 때, 균열이 있다면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그림에서 붉은색~노란색을 띤 부분은 초음파속도가 낮아 풍화에 민감한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이 표면이 떨어져 나오거나 마모되기 쉬운 부분이니 모니터링 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풍화정도는 보통이고 신선한 암석인 것으로 밝혀졌다. 

 

삼전도비의 초음파 속도 2D모델링 (A) 앞면, (B) 뒷면, 출처: 이주완 외, 2009




겸재 정선, <송파진도>, 1741, 20.1x31.5cm, 비단에 채색, 경교명승첩 중,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은 양천 현감 시절에 한강 일대를 유람하며 여러 그림을 남긴다. 이 그림을 모은 것이 <경교명승첩>인데 그중 <송파진도>에 삼전도비가 보인다. 윗 그림 오른쪽에 청기와 누각이 보이는데 이것이 삼전도비다. 그림의 위쪽에는 인조와 대신들이 피란했던 남한산성이다. 왼쪽에 차양이 쳐진 곳이 송파나루다. 삼전도비는 건립 후 청나라 사신의 단골 방문지가 되었는데,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다. 내용은 창피한 이야기지만 금석문은 이제는 사라진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렇게 3개 국어로 새긴 비석은 없다고 한다. 이 글의 끝에 장황하지만 뒷면에 쓰인 한자 비문의 전문을 옮긴다.


2011년 7월 28일 삼전도비는 '서울 삼전도비'라는 이름의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사적으로 정하기엔 면적이 적었지만, 그렇다고 이 창피한 물건을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도 없고, 지방문화재로 하자니 상징하는 사건이 너무 크고 하여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유일한 비석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살짝 오르막 길에 위치하고 나무로 살짝 가려져서 그 많은 관광객이 지나가도 제대로 보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살짝 감춰 놓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커다란 비석이다. 


참고문헌


1. Francois Lapointe  and Raymond S. Bradley, Little Ice Age abruptly triggered by intrusion of Atlantic waters into the Nordic Seas, Science Advances, 15 Dec 2021, Vol 7, Issue 51, DOI: 10.1126/sciadv.abi8230

2. 승정원일기

3. 유성운, 한국사는 없다, 페이지2북스, 2024.8.

4. 이주완, 함철희, 김사덕, 이찬희, 습포제를 이용한 석조문화재의 페인트 오염물 제거기법 연구, 보존과학회지 Vol. 24. No. 4, 2009, pp. 421-430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비문 전문] 대청 황제 공덕비


대청국의 숭덕 원년 겨울 12월,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가 화친을 깨뜨렸기에, 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불꽃처럼 오시니, 누구도 두려워하여 막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 부족한 임금은 남한산성에 머무르면서 마치 봄날에 얼음을 딛고 햇빛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려워한 것이 거의 50일이었다.


동남쪽 여러 도의 군대가 연거푸 무너졌고, 서북방 장군들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멀리 뒤로 물러나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데, 성 안의 식량도 떨어졌다. 이때 대군이 성에 다가서는 것이 마치 서리바람이 가을 풀을 휩쓸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는 것처럼 사나웠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을 무(武)로 삼고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하시어, 이에 칙유를 내리시길, "내게 온다면 너를 온전히 해주겠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하시었다.


이로부터 잉울다이, 마푸타 등의 장수들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잇달아 오가니, 이에 우리 부족한 임금이 문무백관을 모아 이르길, "내가 대국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 황제께서 오히려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타이르심이 이와 같으니, 내 어찌 감히 이를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호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여 마침내 수십 기를 데리고 군문에 와서 죄를 청하니, 황제께서 예로써 대우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 번 보고는 심복으로 삼아, 상을 내리시는 은혜가 따르는 신하들에게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장 우리 부족한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곧장 남쪽으로 간 군대를 거두어 서쪽으로 물러나며, 백성을 어루만져 농사에 힘쓰게 하여, 멀고 가까운 곳의 흩어진 백성들이 모두 다시 와 살게 되었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는가!


소방이 상국에게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을 보내 명나라에 원병하였다가 군대가 패하여 사로잡히자, 태조 무황제께서는 단지 강홍립 등 몇 사람만을 잡아두고 나머지는 모두 뒤에 돌려보내셨으니, 은혜가 이보다 클 수 없었다. 그러나 소방이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매, 정묘년에 황제께서 장군을 보내 동쪽을 정벌하시니, 우리나라의 군신이 모두 바다 섬에 들어가 피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청하였다. 황제께서 윤허하시어, 형제와 같은 나라가 되고 강토가 다시 온전해졌다. 강홍립도 다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계속해서 예우가 한결같고 사신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히도 공허한 의론에 선동되고 난리의 씨앗이 생겨나서, 소방이 지방 수령들에게 신칙하는 말이 몹시 불손했으니, 그 글을 사신들이 얻어서 가져갔다. 황제께서는 그럼에도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장 군대를 보내지 않고, 먼저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군대를 보낼 시기를 기약하며 거듭 깨우치기를 귀를 잡고 얼굴을 맞대듯 하시었다. 그럼에도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소방의 군신들이 지은 죄가 벗어날 수 없이 무거워졌다.


황제의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는 또한 한 갈래 군대에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니, 빈궁과 왕자 및 대신의 가솔들이 모두 사로잡히자, 황제께서는 뭇 장수들을 단속하여 침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호종하던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시었다. 이처럼 큰 은전을 입어, 소방의 군신과 사로잡힌 권속들이 예전처럼 돌아왔으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볕이 되고 마른 가뭄이 바뀌어 단비가 되듯,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끊어진 종사를 잇게 되었다. 동쪽 땅 수천 리가 모두 살게 하는 은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보기 힘든 일이다. 아아 훌륭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다다르신 곳으로, 단을 세운 자리가 있다. 우리 부족한 임금이 수부(水部)에 명하여 단을 높고 크게 증축하고 또한 돌을 가지고 비를 세워서 영원히 남겨두어 드러내니, 황제의 공덕을 천지조화와 나란히 되도록 한 것이다. 어찌 우리 소방만 세세토록 영원히 믿고 살아갈 뿐이겠는가? 또 대국의 인자한 명성과 위엄찬 행실로 멀리서부터 복종해오지 않는 자 없음이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크기를 본뜨고 해와 달의 밝기를 그리려 해 보아도 그 만 분의 일에 비할 수 없으니, 삼가 그 대략을 새겨서 이른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마르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데, 황제께서 이를 본받으시어 위엄과 은덕을 함께 펴셨네. 황제께서 동방을 정벌하시니 그 군세 십만이라,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호랑이 같고 표범 같았네. 서쪽 번국 불모지와 북쪽 부락 사람들도 창을 잡고 앞서가니 그 위세 혁혁하도다. 황제께서 크나큰 인자함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주시니, 열 줄로 내려주신 밝은 회답이 엄하고도 또한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으나, 황제의 밝은 명령 있고 나서는 마치 잠에서 깬 듯하였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 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갖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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