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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산 Oct 29. 2022

아린 마음의 손짓

전학 가는 날

1) 대치초등학교


나는 조용했고 숫기가 없었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해본 기억이 없다.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나는 과묵해야 했고 점잖아야 했다. 그런데 큰일 났다. 오줌이 마려왔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오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손을 들 용기도 없었다.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면 좋으련만. 엄마는 내 얼굴만 보면 내가 뭐하고 싶은지 다 아는데.’

이젠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잉? 이게 뭐야?”

옆에 있는 친구가 놀라서 소리쳤다.

“선생님, 얘 오줌 쌌어요.”

하필 걸상이 친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오줌 싸게’가 되어 버렸다.


2) 전학 가는 날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모습에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계속 손을 흔들고 계셨을 거다. 봄 방학을 마치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잘 가.”

“여름 방학 때 보자.”

친구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두어 번 손만 흔들었다.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나 대신 인사를 한 것 같다.


서울에는 내 친구들이 없다.

전학 가면 친구들이 나를 잊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려오고 자꾸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친구들 바지 주머니에는 생고구마가 들어 있을 거다. 방금 지나친 눈 쌓인 언덕에는 친구들이 던져 놓은 고구마가 눈 속에서 잘 얼고 있겠지. 하굣길에 잘 찾을 수 있을까? 위치를 잘 기억해 야 할 텐데. 친구들과 고구마를 찾아 꺼내 먹으면 엄청 달고 아삭아삭 맛이 있겠지. 조금 있으면 칡뿌리도 캐러 가겠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친구들 모습에 이내 다시 마음이 아려온다.

여름이면 물고랑을 치고 고무신으로 연신 물을 퍼서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고 놀던 개울이 보인다. 가을에는 뭐 했더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 동생도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들 얼굴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어머니가 여러 번 뒤 돌아보셨지만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는 않으셨다.

개울가에 개나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3) 서울 미동초등학교


서울에는 아무도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없다.

엄마의 부엌에는 아직도 물독 밑을 기웃거리는 내 동생이 있을 거다. 아마 오늘도 열심히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엄마를 데려오라고 착한 두꺼비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


전학한 지 한 달 정도 지나 남산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서울의 산은 내 시골의 산과 얼마나 다를까 많이 궁금해졌다. 남산에는 남산타워라고 하는 뾰족한 탑과 팔각정이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조개 모양의 건물도 있었는데 음악당이라고 했다. 식물원에는 여러 가지 못 보던 식물들과 꽃들이 있었지만, 다 그냥 그런 거처럼 보였고 내겐 후덥지근하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남산에는 나무가 있고, 넓은 잔디가 있고, 개울도 있어 너무 좋았다. 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개구리와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오래간만에 시골 친구들과 놀다 온 기분이다.

그리운 시골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 친구들도 나를 잊지 않았을 거다. 칡뿌리 캐 먹고 입가에는 온통 검게 물들고 하얀 이를 드러낸 정겨운 내 친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고무신으로 물을 퍼내고 송사리를 잡고 놀던 개울가도 그대로다.


4) 산모퉁이에는 지금도 고구마가 있을까?


대학 입학을 앞둔 해 2월에야, 오랜만에 시골집으로 향했다. 고향 생각을 할 때면 언제나, 잘 가라고 인사하던 친구들과 하염없이 손을 흔드시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오고 금세 눈물이 맺힌다.

저기 산모퉁이에는 지금도 고구마가 있을까?

조심스레 눈 덮인 언덕 구석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구멍 자국 하나가 보였다. 숨을 죽이며 손가락으로 눈을 살살 걷어내는데, 와! 정말로 거기에 고구마가 있었다. 보물 찾기를 하듯이 여기저기에 흩어진 고구마를 한데 모았다.

눈을 살짝 덮어 놓고 잘 보이도록 나뭇가지를 꽂아 놓았다.

그 옆에 조그만 눈사람도 하나 만들어 두었다.

내 어린 꼬마 친구들이 좋아할 거다.

눈에 묻힌 고구마가 금세 나를 어린 그 시절로 이끌었다.

한 개 깨물어 보았으면 아삭아삭 달콤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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