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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지 Oct 05. 2022

한국어 강사가 건너야 하는 강

오늘의 어휘: 시강

※다음 글 또는 그래프의 내용과 같은 것을 고르십시오.

  [채용 공고]

  ◇지원 자격: 

    -한국어교육 전공 석사학위 소지 이상인 자

    -한국어교육 관련 학과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로 한국어 교원 자격증(1~3급) 소지자

    -외국어 능통자 우대

  ◇시급: 경력에 따라 책정

  ◇일정: 1차 서류 전형-2차 면접 및 시범 강의


  ① 한국어 교육 연구기관의 정규직 연구원을 뽑는 공고이다.

  ② 한국어 교원 1급 자격증이 있으면 석사학위가 없어도 지원할 수 있다.

  ③ 한국어 교원 1급 자격증과 석사학위가 있어도 시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④ 한국어 교육 관련 석사학위가 있고 외국어가 능통하면 월급제로 임금을 받는다.



  학기가 끝날 즈음, 대학 어학당마다 한국어 강사를 뽑는다는 공고들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온다. 외국인 학생들이 대폭 증가해서 한국어 강사가 그만큼 더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어 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정년퇴직을 하거나 임신·출산 등을 했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계약 기간 종료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대학으로 이동하는 강사들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대학들이 기존 강사들과 계약 해지하고 더 나은 실력을 갖춘 강사들을 뽑기 위함인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구인 공고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하다. 내정자를 정해 두고 낸 형식적인 공고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계절이 되면 동료 선생님들과 나누는 대화. 이젠 하우 아 유, 파인 땡큐 같기도 한.


  ―선생님, 이번에 그 학교에 원서 내 보지 그래요?


  물론 현재의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대학과 병행해서 주당 수업 시수를 늘려 보라는 권유.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거의 같다.


  ―안 낼 거예요. 아니, 못 내요.


  왜요, 하고 그 선생님의 눈이 되묻는다.


  ―시강해야 되잖아요. 시강, 자신 없어요.


  나는 시강이 싫다. 학생들 앞에서는 활발한 몸과 마음이, 학생인 척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오그라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강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심사하기 위해서 시강을 요구하는 것은 면접관들의 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인정받는 기관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면 강의를 웬만큼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신임 강사라면 모를까, 경력을 인정해 뽑는 강사들에게까지 왜 한결같이 시강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문제 풀이]


  나도 옮겨 볼까 하는 생각으로 한국어 강사 구인 공고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 교수와 관련한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가, 찾은 김에 카페에 올려진 그런 공고들도 슬쩍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다 집과 가까운 학교 또 대우가 좋은 학교의 공고를 보면, 일순 마음이 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3개월마다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

  하지만, 그랬다가도, 거의 모든 공고에 박혀 있는 단어 때문에 마음을 접는다. 바로 ‘시범 강의(시강)’ 때문이다. 대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어 교육 기관들이 한국어 강사를 뽑을 때 시강을 본다. 시강을 하려면 교안을 써야 하고(교안도 제출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 PPT 자료나 단어·문장 카드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면접관 앞에서 교실에서 하듯 똑같이 수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강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제출하라는 학교도 있다(이런 것을 준비하는 데 따르는 시간과 비용은 보상받지 못한다).

  한국어 교육 경력이 없거나 대학 기관에서 한국어 교육을 한 경험이 없는 신임 강사일 때는 이런 시강을 거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학습자들에게 어떤 자세로 임하고 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면접관들이 조금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대학의 교육 기관들은 대부분 경력자를 원한다. 그래서 지원하는 선생님들의 대부분은 몇 년씩 수업을 해 본 경력자들이다. 그런데도 대학은 이들에게 시강을 요구한다. 

  나는 이 시강이야말로 한국어 강사들의 사회적 입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A대학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외과의사가 B대학병원으로 옮기려면 면접관 앞에서 수술이라도 해 보여야 하는 것일까? C기업의 패션 디자이너가 D기업으로 옮기고 싶으면, 면접을 볼 때 옷 만드는 작업을 직접 시연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A대학병원에서 쌓은 경력, C기업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인정받아, 그 의사와 패션 디자이너는 서류와 면접 전형만을 거치게 될 것이다.


  경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무례

  그런데 왜 한국어 강사는 무엇이 못 미더워서 경력직에게까지 시강을 요구하는 것일까. 대학마다 수업 방식이 달라서 그런 것이라면, 채용한 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주의시키면 된다. 혹시 목소리나 태도, 그리고 한국어 문법에 관한 지식 같은 것을 살피고 싶은 것이라면 면접 시의 질문을 통해 충분히 체크하면 된다.

  경력이 20년, 30년이 넘어서도 시강을 하게 될까 무섭다. 그런 나이가 된 한국어 강사를 뽑아 주는 곳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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