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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08. 2022

파삭한 식감의 ‘단호박 전’

호박 한 덩이, 따듯한 마음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함민복의 ‘호박’ 일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호박잎과 열매는 넘쳐났다. 울 밑의 호박넝쿨은 담장을 오르고, 텃밭 가장자리의 넝쿨은 둔덕을 향해 왕성하게 나아갔다.

햇살이 막 퍼지는 아침에 오빠 따라 꿀벌 사냥에 나섰다. 호박꽃 속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슬 젖은 꽃가루에 매달린 꿀벌이 보이면 잽싸게 꽃잎을 오므려 움켜쥐었다. 벌은 호박꽃에 갇혀서 앵앵거렸다. 반딧불이 대신 벌을 잡아서 호박꽃등 놀이를 했다.

애호박 채 썰어 국수에, 된장찌개 끓일 때, 비 오는 날 부쳐 먹는 호박전, 국물 반찬이 필요할 때는 호박 새우젓찌개, 호박 반찬은 끼니때마다 상에 오르는 터줏대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호박 반찬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컹한 식감이 마뜩잖았다. 늙은 호박은 더 터부시했다. 달지도 않은 들큼한 맛, 그렇다고 색감이 선명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가을걷이 한 호박을 고지로 만들었다. 겨울에 호박고지 넣은 떡과 찌개가 가끔 올라왔으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집 안팎에 나뒹구는 늙은 호박은 쇠죽 솥에 삶겨 소 여물통과 돼지 밥통으로 배분되었다.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 인사하러 들렀다. 늦가을 해는 짧아 시골집에 들어서니 한창 저녁 식사 중이었다. 남자는 밥상을 들여다보며 싱글거렸다. 사발에 담긴 누렇고 거무튀튀한 색감의 음식, 그 속에는 찰떡도 들었고 콩과 팥도 섞여 있었다. 남자는 수저를 들자마자 후루룩후루룩 두 그릇이나 비웠다. 멈칫거리는 나를 보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가 보다”며 걱정하는 어른 목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한 수저 떴다. 들큼하고 질척한 음식은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모양새로 봐서는 유년 고향 집에서 보았던 꿀꿀이죽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훗날 그 음식이 호박범벅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마솥에 콩과 팥을 넣고 푹덕푹덕 끓이다 보니 팥물이 배여 색감이 탁했던 것이었다.


고향 집에서는 죽을 차리지 않았다. 죽을 끓이면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앓아누웠을 때만 먹는 게 죽이었다. 유일하게 먹은 것은 동지팥죽뿐이었다.

큰아이는 아빠의 유전자를 닮았나 보다. 누런 호박덩이를 보면 전 부쳐달라고 칭얼거린다. 호박을 반으로 가른다. 소복하게 들어있는 씨앗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다 걷어낸 후 호박 속살을 긁어낸다. 예전에는 숟가락으로 호박을 긁었으나 요즘은 호박 긁는 도구가 있어 편리하다. 손질한 호박에 소금을 살짝 뿌려 숨을 죽이고 물기를 꼭 짠 후, 밀가루는 재료가 엉겨 붙을 정도로만 넣어 전을 부친다. 반죽에 물을 넣는 것은 난센스다. 최대한 얇게 부치는 게 실력이다. 반죽이 남으면 한 번 먹을 분량으로 포장하여 냉동 보관했다가 사용하면 된다.


호박 걷이 철이다. 호박 몇 덩이를 구석에 밀쳐놓아야 든든하니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있어도 손이 잘 가지 않으나, 없으면 서운하다. 가끔 몸이 한가할 때 호박을 어루만진다.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그나마 내가 주저하지 않고 먹는 것은 단호박이다. 애호박일 때도 육질이 단단해 반찬용으로 사용한다. 단호박을 갈라 속을 긁어내어 전을 부치면 색이 선명하고, 식감도 밤고구마처럼 파삭거린다. 


Tip: 단호박은 워낙 육질이 단단해서 칼 사용에 주의한다. 단호박에는 일반 호박과 달리 수분이 적어 소금에 절이지 않아도 된다. 당질이 15~20%를 차지하는 단호박은 항암효과는 물론 감기 예방과 피부미용, 변비 예방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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