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내가 근무하는 곳은 여전히 바다다.
예전처럼 해외나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지는 않지만,
항해사 경력과 연계되는 많은 직업이 존재한다.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예인선인데,
대형 화물선의 입출항을 보조하는 고마력의 선박이다.
이 업계는 근무 스케줄이 독특한데 3일 근무, 3일 휴무를 반복한다.
그리고 근무하는 3일 동안도 일평균 4시간 정도의 노동만 하면 집에서 쉬거나 취미를 즐기고 돌아올 수도 있다.
일 년에 반 이상을 놀지만 주말이 아닌 평일에 쉬는 날도 많기에,
미혼 자취생인 나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야심 차게 당근 모임에 참여했지만 딱히 달라진 기분을 느끼진 못 했다.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며칠에 한 번은 그 내용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다 토론이 벌어지면 몇 시간이고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인간관계를 맺고 싶다는 소망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솔직히 여자친구가 생길 확률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당근 모임의 카카오톡 단톡방이 개설됐다.
아직 일정 내용밖에 올리지 않지만 나름 재치 있는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글을 올렸다.
이번 주에는 저번에 불참했던 멤버도 참여한다고 한다.
장소는 부평역 인근 투썸플레이스 3층 구석.
나름 신경 쓴 옷차림과 머리스타일을 정돈하고 자리로 향했다.
처음 본 멤버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각자 소개를 했고 그가 물리학과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잠시 후 수수한 여성도 도착하여 모임이 진행 됐다.
이번에도 모임장은 질문지를 가지고 왔다.
각자 버킷리스트 작성하고 설명하기.
'참 허영심 가득한 질문지네'
하는 생각을 도로 삼켜버렸다.
나는 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안다.
지나치게 이성지향적이며 취미에 돈 쓰는 것에 인색하다.
이번 시간도 저번 시간과 별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다.
주제와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며 친분을 쌓아 올리는 시기였다.
이번 시간도 모임을 마치고 단체 인증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친구와 강원도의 천문대를 보러 여행을 갔는데.
그 와중에 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인증사진도 보여줬다.
친구는 사진 속 두 여성이 아주 예쁘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감 있게 친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지만 나는 둘 중 누구와도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