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에? 휴직이요?"
겨울에 시작된 코로나의 위력은 사람들로 북적대던 인천공항을 멈춰 버렸고, 공항에서 그림자처럼 일하고 있던 영숙의 존재를 회사에서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 0순위로 휴직을 시켜버렸다.
세계공항이 전염 속도보다 빠르게 모든 것을 멈춰버린 상황에서 능력 없는 영숙이 그나마 짤리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게 봄도 오기 전에 시작한 휴직은 한여름에 접어들어도 회사에서 부르지 않으니,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불안감이 영숙을 스멀스멀 괴롭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항 일이 맞지 않았던 영숙은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염병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멀게 만들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했고, 단체 모임은 금지됐으며, 신데렐라도 귀가시간이 자정인데 9시만 되면 해산을 해야만 하는 요상한 세상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회적 혼자 두기로, 독거인을 완전 고립시켜 마음까지 병들게 하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윗대부터 술은 기똥차게 잘 마시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영숙은 술로 무료함을 달랜다는 것이 그 양이 점점 늘어나, 오늘도 어김없이 숙취로 인한 갈증으로 겨우 눈을 떴다.
침대 바닥에서 어제 마시다 둔 미지근한 생수를 찾아 벌컥벌컥 마신다.
몇 시쯤 되었을까? 누가 훔쳐볼까 꼼꼼하게 쳐둔 암막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이미 들어섰다. 침대를 지나 드레스룸까지 길게 비춘 것을 보니, 정오는 훌쩍 지났나 보다.
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목을 축인 영숙은 다시 어두운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겨울 이불이 주는 묵직함이 영숙을 감싸준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밤이 오든지 말든지, 이러고 있을 것이다. 영숙은 마음만 먹으면 자고 또 자고를 반복할 수 있는 능력자이기에 할 수 있다. 단지 조금 외로운 기분이 별로다.
‘젠장.’
갈증이 계속 나는 것이 잠을 깨운다. 숙취로 인한 갈증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이라 덜 깬 몸을 일으켜, 거실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콸콸 들이부은 생수에 내장까지 시원하다.
청소기를 돌린 기억도 없는 거실에는 햇살에 비친 뽀얀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나름 분위기 있어 보인다.
" 야~ 내가 누군지 알고 안 태워?"
" 야~ 너 가만 안 둘 거야! "
" 야~ 너 이 시계가 얼마인지 알기는 해?"
지들이 쇼핑한다고 비행기를 놓치고는 항공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영숙이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일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이렇게 강제 휴직을 당할 줄 알았으면, 그때 참지 말고 확 들이박아 버릴 것을 그랬다. 뒤늦은 억울함에 문득 화가 치민다.
“도대체 비행기 놓친 거랑 시계 가격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몹시 궁급합니다. 님.”
아! 그랬으면 휴직이 아니라 퇴사였겠지.
묵은지처럼 지지난 일을 가지고 쪼잔하게 혼잣말로 절대 못할 반박을 해본다. 회사를 오래 못 나간 후유증인가. 아님 혼자 너무 오래 있었나 혼잣말이 위로가 된다.
고객이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상황파악도 안 하고 무조건 ‘죄송합니다'로 대처하는 영숙과 다르게, 외모도 화려하고, 말투조차 당당한 직원들을 보면, 인도 카스트 제도처럼 태생부터 영숙과는 다른 신분처럼 보였다.
차가운 생수병을 들고 다시 어두운 방 침대에 눕는다. 해시계와 상관없이 영숙은 다시 잘 것이다.
초과수하물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자, 중국 위엔 다발을 던졌던 조선족 고객도, 뻑하면 너 말고 윗대가리 나오라고 개무시하던 넥타이 고객도, 아이고 이년아 이년아‘ 하며 당신 성에 차지 않아하던 엄마도, 모두 당분간 사회적 거리 두기 중이니 나쁘진 않다.
현재 재정 상태는 약간 거시기하지만, 조만간 회사가 다시 불러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괴팍하고 돈 많은 엄마에게 손은 벌리지 않을 것이다. 술이던, 잠이던, 이 몽롱함이 주는 평온함이 나쁘지 않다.
위이잉~ 위이잉~
숙면 중이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린다.
회사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진동으로 상시 대기를 시켜놨던 핸드폰에서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울린다.
연락 올 곳 없는 영숙에게 누가 전화를 하는 걸까? 그런데 낯설지 않은 번호에 영숙은 찬찬히 읽어본다.
공. 일. 공 사오.. 헉!
핸드폰이 깨어나면서 잠자던 영숙의 심장도 쿵쿵 뛰기 시작한다. 그놈이다.
스프링처럼 튕겨져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어두운 방안을 환하게 밝히는 그놈 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감히 받을 용기는 생기지 않고, 심장은 터져라 쿵.쾅.쿵.쾅 댄다.
그만하자
문자 하나만 보내고 날 버린 그놈이 2년 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알고 있었다. 내 사랑은 너무 깊었고, 니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만 더, 조금만 더, 더한 마음으로 곁에 남고 싶었던 영숙은 의외로 덤덤하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끝을 냈었다.
미안했어. 잘 지내
이별은 간단했지만, 영숙의 사랑은 이미 깊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눕지도 앉지도 못했던 통증은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어느 날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몹쓸 병에 걸려 영숙의 곁에서 죽어버리기를 바랬던 집착까지 생겼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겨우 채워 살고 있었는데, 비웃기라도 하듯 그놈의 부재중 전화는 '날 감히 잊어' 라며 뻔뻔스럽고 당당해 보였다.
‘왜 전화했을까?’
‘왜 내 번호를 지우지 않았지? 아니면 외우고 있었나?'
'혹시,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어쩌지?’
더 이상 누울 수 없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을 서성이며 호흡을 가다듬어 보지만 이미 엉망이다.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했음에도 부재중 한통에 다시 병신처럼 흔들리다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답답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실 밖 저 멀리 인천대교는 어느새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잘못 누른 거겠지.'
모자를 눌러쓰고 집 앞 바닷가로 나간다. 더 이상 혼자 있다가는 그놈의 번호를 누르고 마는 실수를 할 것 같다.
관광객들과 연인들로 북적대던 부둣가에도 영숙처럼 휴직을 당한 듯 적막한 밤으로 덮여있다. 영숙은 한참을 돌아 걸어, 부둣가 중심 상가지역에서 멀찌건히 떨어진 작은 술집으로 들어간다.
" 왔어?"
손님 없는 가게 사장은 흰색 남방에 청바지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귀티나는 모습의 선배이다.
영숙이 승무원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지상직 인턴직원으로 공항에 채용되었을 때, 선배를 사수로 처음 만났다. 무심한 듯 잘도 챙겨주었던 선배는 외모까지 완벽했었다.
영숙에게는 드물게 찾아온 행운이라 절대 놓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도.
어느 날 선배는 선배답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지금은 텅 빈 가게에서 혼자 땅콩과 맥주를 홀짝대고 있는 사장이 되었다.
" 뭐 해? 선배?"
" 맥주~ "
분명 저걸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 밥은 먹었어?"
" 너나 먹고 다녀. 그나저나 생맥주 뽑는 기계가 너무 오래돼서 탄산이 다 빠진 것 같으."
" 근데 왜 마셔?"
" 아깝잖아, 너도 한잔 해."
김 빠진 생맥주는 집에서 마신 미지근한 생수만큼이나 밍밍했다.
" 선배, 그 새끼 전화 왔었어."
" 왜?"
" 몰라, 안 받았어."
" 왜?"
" 그냥, 나도 모르겠어. 그냥... 받을 수가 없었어. "
" 또 오면 받아. 아니면 니가 걸 거잖아."
전화를 걸 것 같은 불안감에 집을 나왔는데, 역시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선배다.
탄산 빠진 맥주 꼬라지가 보리차도 맥주도 아닌 것이, 영숙을 닮았다.
"난 소주 마실래."
빈속을 쓸어내리는 소주의 싸한 목 넘김이, 멍했던 영숙을 깨운다. 그렇게 홀짝홀짝 세상이 이뻐 보일 때까지 마셨지만,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나 간다. 선배."
바다 공원 길 따라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2년 전과 똑같이 가슴이 아렸다.
얼마나 울다 잠들었을까, 갈증으로 깨어나, 침대 옆에 널부러진 미지근한 생수를 마시고, 핸드폰의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그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술을 왜 그렇게 마셨어? 괜찮아? 일어나면 전화 줘 걱정되니까.
핸드폰 기록을 뒤져본다.
통화시간 30분, 그것도 영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