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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이 Jun 15. 2024

배틀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우리

꼬마들이 엘사병에 걸려, 너도 나도 엘사 장식 하나씩 달고 가게로 들어와서는 이모 이모 하며 난리다. 용감한 왕눈이 안나가 낫지, 왜 하필 저주받은 엘사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영숙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 같은데, 난쟁이 엘사들이 서로 자기가 예쁘다며, 관심 없는 이모를 끌어들여 심판을 보게 한다.


이모, 누가 제일 엘사처럼 이뻐요?

이모는 내가 제일 이쁘다 했어. 그쵸?

아냐! 내가 제일이라고 했어. 이모, 맞죠?

아니야~ 저번에 엘사보다 내가 더 예쁘다고 했어. 그치, 이모?


아~ 동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이 난쟁이들을 어찌할꼬, 난감하다.



햇살 좋은 날 모처럼 가게 앞 캠핑 의자에 앉아 하늘 구경하는 이모 곁으로 하나 둘 참새들이 모여든다.

의자 하나에 서로 엉켜 같이 앉으려고, 무릎에 발걸이에 어깨에 발등에 조금이라도 달라붙어 참새처럼 조잘댄다. 보고 있자니 햇살보다 빛이 난다. 영숙의 영혼까지 밝아지는 것 같다.

미소로 영숙이 답하는 영숙에게 신이 나서 하던 이야기는 요상하게 흘러 선을 넘어 버렸다. 영숙에게 안해도 되는 말, 가정사 배틀이 붙어 버렸다.


울 엄마 고등학생 때 나 낳았다.

울 새아빠는 엄마 보고 누나~라고 부른다.

울 아빠랑 엄마랑은 스무 개 넘게 차이난다.

외할머니가 아빠보다 어리다.

야! 그건 니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잖아.


햇살보다 눈부시게 투명해서인가, 굳이 그것까지... 너희들을 어쩌면 좋니, 난감하다.






그래도 엘사 난쟁이들은 귀엽기라도 하지,  고학년들은 업무 방해에 교통법규 위반으로 영숙을 진정 빡치게 만든다.

자칭 미녀 삼총사가 가게 안으로 난입한다. 마치 무대에 등장하는 고등래퍼처럼 가게 문을 열어 제끼고는 뭐라 뭐라 나불대며, 삿대질에 몸까지 꺾으면서 들어온다. 그게 랩과 춤이란다.

곱슬머리의 개다리 춤을 내버려 둔 것이 잘못된 시초였나, 고학년 언니들인 지들도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가게 안에서 난리를 친다. 참다 참다 쫓아내면 이미 흥은 올라 가게 문 앞에서 바람 풍선처럼 흔들어댄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걸걸한 목소리에 취임새까지 넣어가며 오가는 사람들이 낄낄대며 구경해도 개의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선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런데 짜증 나게 꽤나 수준급이라는 거다. 힐끔힐끔 눈이 자꾸 가는 게 예사 솜씨는 아닌 건 맞다.

언제부터인가 심장병이 다 나았는지 얌전한 작은 아이도 곁다리 껴서 깔짝 춤을 춰댄다. 저 날라리들이 모양 빠질 텐데, 작은 아이를 내치지 않고 같이 다녀주는 것이 나름 괜찮아 보여 가끔 영업방해를 눈 감아주면, 그날은 어김없이 배틀이 붙어 가게 안은 굿판이 난다.



늦은 밤 가게 앞 도로 삼거리에서, 남자애들이 줄넘기 내기 배틀이 붙었다.

학교 앞이라 시속 30 이상은 달리진 않겠지만, 어두운 저녁에 고학년이나 되는 녀석들이 오가는 차들을 피해 가며 굳이  줄넘기를 하는 꼬락서니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숙이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야~~~ 너희 지금 몇 시야, 당장 집에 안 가!

갈 거예요. 이번 판만 하고요.

야~ ~~ 도대체 이번 판이 몇 판째야! 당장 안가!

우씨~ 이모 깡패예요? 맨날 소리 질러요. 야! 내일 다시 붙어. 이번에는 배드민턴이다. 알았지?


심장 쫄깃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뭐 내일은 배드민턴 배틀이라고?

왜 동네 애들이 노는 공터는 밤이 되면 불량 고딩들 아지트가 되어버리는지, 신경 쓰지 않게 학교 운동장을 개방해 주던지, 지콩을 시켜서 구청에 또 민원을 넣을까 보다.

내일 또 녀석들과 한바탕 할 생각에 머리가 찌끈거린다.






놀부가 퇴원했다. 바람났던 빙구가 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하지만 코 묻은 돈을 벌어, 가게 유지비와 지콩 월급만으로도 버거운 현실에서 넷이 다시 뭉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치였다.



“ 젠장! 우리 정식으로 이별 주나 한잔하자. ”



안 본 사이에 살이 더 찐 놀부가 사 온 족발에 한잔 두 잔 기울이다 보니, 주마등처럼 우리의 어색했던 첫 만남부터 밤을 꼴딱 새우며 바쁘게 일해 얻은 신속 배달 야식맛집의 희로애락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영숙을 챙겨줬었는데 결국 돈에 밀려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하나 둘 쌓여가는 술병에 새삼 망한 야식가게를 아쉬워하며 분위기는 가라앉고 말았다. 술에 취해 울먹대는 우리를 김광석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럴 수 있다는 듯, 다시 할 수 있다며, 목청껏 응원해 주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 배신자! 자기는 포기했으면서, 우리 보고 자꾸 일어나래. 젠장! 인생 더럽네. ”


“누나, 왜 갑자기 급발진해? 술 취하니까 이제 드디어 누나의 이중생활이 지겨워? 분식집에서는 세상 천사 오지라퍼 이모, 가게 불 꺼지면 망한 야식가게 사장 코스프레, 크크. ”



영숙이 그냥 술김에 한 말에 지콩이 정곡을 찔렀다. 지콩은 영숙도 모르는 영숙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가끔 무섭다. 그런데 갑자기 놀부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기들 때문에 순진한 누나가 입에 걸레를 물었다며, 괜히 고생시키고 사람만 망쳤다며, 놀부가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 몰랐고, 급기야 그 큰 덩치를 영숙에게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어댔다.



“ 우리 착한 누나가.. 꺼~어억, 그 개새끼 만나서... 꺼억~ 개고생 꺼억~ 개털 되고… 반 죽여놨어... 미안해. 꺼억~ 빙신 누나~~ 으아앙~~. ”


“ 야! 조용해. 새끼야!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지랄야! 저 새끼 드디어 본전 나오네. 누나, 신경 꺼. 저 자식 진짜 술버릇을 이제야 보는 거야. ”


영숙이 술김에 욱해서 한 말에 이렇게 울며 안길 일인가, 개가 나오고 누굴 반 죽였다는 건지, 커다랗고 뻘겋게 달궈진 멍게 피부 얼굴을 들이대고 우는 놀부를 참고 있자니, 영숙은 술이 깰 것 같았다. 덩치 큰 못냄이를 차마 밀치지 못하고, 마지막 술주정이니 받아주기로 했다.

뭐 왜 우는지 알 것 같기는 했다. 세상에서 제일 험하게 생겼어도 여린 동생이다. 특히 약자에게는 약한 자라, 폐지할머니와 어리숙한 영숙에게는 참 잘해주었다. 그런 놀부를 만난 건 영숙에게 행운이었다. 덕분에 이젠 덩치 크고 못생긴 문신남자를 봐도 겁부터 먹진 않는다.

그렇게 술에 빠져, 울보 놀부를 달래며 빙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양손에 술 병 잔뜩 가지고 나타났다.



“ 우리 이거 마시자. 성괴누나가 빼돌려 준거야. ”


“ 야! 헤어진 거 아니었어? ”


“ 아니, 그 누나 혼자 헤어진 거야. 난 아니야. 사랑이 흑흑… 사람이 흑흑… 뭐 그리 쉽게 변하냐고 흑. ”


“ 야! 니가 할 개소리는 아니잖여. 뻑하면 바람나는 새끼가 무슨 사랑 타령이야. 암튼 잘 마실께. 자자 하나씩 잡아 봐. ”


“ 인생 꽃 같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



동생들은 못난 대로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준 스승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영숙도 따라 왼쪽 팔뚝에 뱀꼬리 문신이라도 새기고 싶다. 지콩이 그랬다. 이게 은근 자기를 지켜준다고. 자기를 사람들이 깔볼 때 팔뚝에 문신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무튼 돈은 말아먹었지만 과거 영숙과는 안녕이다. 세상을 대하는 것이 단단해졌다. 또 유해지기도 했고, 못냄이 오징어들 안 만났으면 계속 쭈구리 영숙으로 살았을 텐데, 사기 친 그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사실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이지만, 아직 미련스럽게 그놈의 소식이 궁금한 영숙이었다.


“ 아까 누구를 반 죽여놨다고 했어?”


“ 어, 이제 얘기해 주지 뭐. 화내지는 마. 한참 가게 장사 잘될 때 전 사장이 찾아왔었어. 누나 보겠다는 거였어. 이게 우리의 직감이 무서운 게, 누나한테 또 사기 치려는 냄새가 훅 나더라고. 누나 며칠 잠수 탈 때라, 첨에는 말로 했는데 안되길래 놀부가 선방 날려 버렸고, 우리도 같이 그냥 다구리 처 버렸지 뭐. 그 새끼는 좀 처 맞아야 했어. 누나 보니까 가만 냅두면 또 당할게 뻔했으니까. 그 새끼 오지게 맞았는데 신고도 안했어. 지가 쓰레기인 거 지도 아니까. ”  


“ 아…”


듣지 말걸 들었나, 이제 정말 작은 미련도 남길 수 없게 되었다.

그걸 핑계 삼아 영숙은 또 마셨고, 또 마셨다. 세상은 거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가게 문이 확 열리면서 지호아빠가 들어왔다. 문을 확 열어젖히는 것은 몹시 못 마땅했지만, 정말 오징어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훈남의 무례한 짓이라 용서가 되었다. 그런데 왜 영숙은 마음이 가질 않을까, 왜 지호아빠에게는 설렘이 빠질까, 남녀 사이는 참 알 수가 없다.



“ 영숙씨, 벌써 취했어요? 동생들 왔다고 해서 가게 급하게 닫고 안주거리 만들어서 왔는데, 이 분위기 뭐야? 저 덩치 아니, 놀부는 왜 영숙씨에게 기대고 있는 거지? 설마 둘이… 아니지? “


“ 에이~ 형, 오해할 걸 오해해. 누나는 눈 없어? 그리고 놀부가 아무리 취해도 양심 없을까? 저 얼굴에 누굴 넘 보겠어. 어여 앉아서 이별주나 동참하시죠. ”


“그래? 그래도 좀 떨어져 앉지. “

꿈쩍도 하지 않는 놀부를 지호아빠가 대놓고 불쾌하게 쳐다봤지만, 놀부는 이미 만취 수준이었다.

지호아빠는 못마땅한 놀부를 타깃으로 삼고 술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미 취한 놀부는 자기가 왜 타깃인지도 모른 채 단순무식의 오기가 발동해서 주는 술을 넙죽 들이키고 다시 건넸다. 그렇게 둘이서 술 배틀이 붙었다. 떡대가 어마한 놀부와 깡다구 지호아빠의 배틀은 시원시원했다. 이미 취한 영숙과 지콩은 멋있다며 괴성으로 환호했다. 빙구는 실실 웃다가 울며 성괴누나가 빼돌린 술병을 자작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김광석이 흥을 보태주니 가게는 한껏 더 취해 버렸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 위로 나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에드벨룬… 태공에게 잡혀온 참새만~이 긴 숨을 내~쉰다!


승자가 서서히 판가름 나고 있었다. 놀부의 몸이 한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고, 지호아빠는 꼿꼿했다. 저 멧돼지를 누가 치우냐며 지콩이 이제 그만 먹이라고 지호아빠를 말리자, 그제서야 지호아빠도 웃기 시작했다. 잔을 내려놓으면서 대뜸 영숙에게 일방적인 부탁을 했다.


“ 영숙씨, 앞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기요~ 지호아버지~ 말고, 정우씨, 아님 그래! 정우오빠 좋네, 부탁합니다. ”


“ 오오~~ 형 멋찐데! 정우는 우리가 주문하는 치킨 업체 상호인데 크크크 좋았스~ 누나, 꼭 형 이름으로 불러라. 약속해. ”





갈증이 난다. 하지만 일어나기에는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얼마나 마셨는지, 어렴풋한 기억 속에 놀부는 뻗었고, 빙구는 어느 기억에서부터 인가 사라져 버렸다. 아마 잊지 못한 성괴누나를 찾아갔을 것이다.

어렴풋이 나머지 셋이서 많이 또 마셨던 건 기억이 난다. 얘기도 많이 했던 것 같고, 다행이다. 모두가 취했을 테니까. 노래도 따라 불렀던 것 같다. 김광석의 노래 가사가 자꾸 맴돈다.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묻혀 갈 나의 인생아~ 묻혀 갈  나의 인생아~ 묻혀…  

누가 펑펑 운 것 같기도, 기대어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에이 모르겠다.







못 견디는 갈증에, 시끄러운 새소리에 눈이 다시 떠졌다. 언제부터 집에서 새소리가 들렸는지 모르겠다. 핸드폰을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이다. 선배에게서 온 긴 문자와 노래방 카드사용 내역이 찍혀 있었다.

노래방? 기억에 없는데 하루종일 떡볶이를 팔아도 나오지 않는 나의 일당을 유흥비로 쓰다니, 그런데 왜 기억은 하나도 안나는 건지, 불안하다. 마지막 기억은 지호아빠 아니 정우씨와 놀부가 배틀이 붙었고 놀부가 택시에 태워져 갔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뒤죽박죽이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다시 생각해 보자.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그제서야 주변이 낯설다는 것을 알았다. 온통 핑크색인 낯선 방, 미치겠다. 설마, 벌떡 일어나 옆 자리를 본다. 지호가 세상 곤히 잠들어있다. 조용히 핸드폰과 외투를 챙겨 들고 방 문을 열고 나간다. 거실 작은 소파에 정우씨가 움츠린 채 자고 있다. 조심스레 현관으로 나가려는 뒤에서 다정하게 불렀다.



“ 진아, 벌써 일어났어? ”



영숙은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았다. 어릴 적 오직 아빠만이 불러 주었던 진아를, 추억 속에 꽁꽁 숨겨둔 진아를 정우가 따뜻하게 불러 주다니.

영숙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따뜻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에, 그게 아빠의 손길인양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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