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핑계의 잔소리
선배는 영숙에게 긴 메시지를 남기고, 캐나다 빅토리아의 어느 작은 섬으로 떠나 버렸다.
숙아,
마지막으로 보고 얘기하려고 갔었는데, 가게에서 아이들과 정신없이 보내는 널 보고 그냥 문자로 전한다. 말없는 우리 사이에 긴 글의 수다를 남기려니 좀 그러네ㅎㅎ.
우린 특별했다 그치? 처음 너를 봤을 때 여리고 보호본능만 일으켰었는데, 지금은 생선 대가리도 한방에 칠 여전사로 변한 모습에 많이 놀랐어. 뭐가 너를 활어처럼 팔딱거리게 만들었는지, 드디어 살아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어.
난 한국 뜬다. 언제 돌아올지 약속은 못하겠네 긴 휴식에 들어갈 것 같아. 아니면 사고 칠 것 같아서. 남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 회사 다니는 게 너무 숨 막히게 싫어서 떠났는데, 결국 장사도 나를 쪼아대네. 인생 참 꽃 같네.
나는 다시 숨 쉴 구석을 찾아 또 떠난다. 너의 사수는 떠나지만, 그럼에도 너의 영원한 사수이고 싶어 감히 조언을 남긴다.
숙아, 남에게 좋은 사람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 너만 모르나 본데, 이미 넌 넘치게 괜찮은 사람이야. 더 베풀면 진짜 호구되니까 명심해. 그리고 널 버린 그놈은 제발 그만 잊어라.
에효~ 바보야! 언제쯤 널 사랑할 거니? 날 봐, 힘들다 싶으니까 모든 걸 버리고 날 챙기러 떠나잖아. 하긴 이건 쫌 대책 없는 라이프 스타일이라 별로네.
그리고 마지막 악담인데 넌 장사는 아니야. 내가 망해보니 알겠어. 이익을 창출해야 장사에서 너와 나는 안 되는 사람들이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거리의 수많은 간판들 속에 우리가 해낼 사업은 없어. 그냥 남의 돈 받으면서 일하고 소비하는 게 답 같지 않은 답이야. 계산도 어둡고, 돈 욕심도 없는 넌 조만간 만세 할거다. 내가 장담해.
그냥 지금은 즐기고, 회사에서 호출 오면 밍기적대지 말고 바로 출근해. 장사한다고 없는 돈 그만 쥐어 짜내고, 원래의 니 자리로 돌아가. 그리고 너의 신체조건에 딱 어울리는 사내 승무원에 도전해 봐. 너의 그 긴팔은 좁은 기내에서 요긴하게 쓰이지, 식당 이모의 두껍고 단단한 전문가의 팔은 아니란다.
언니는 빅토리아 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긴 휴식을 취하며, 너를 응원하고 있을게.
언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아... 선배
봄이 오고 있었다. 새들의 조잘거림조차 우렁차게 들릴 정도로 세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참새 방앗간은 아이들의 하굣길 필수코스로 정오 무렵 저학년을 시작으로 늦은 오후에는 인근 여중생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오픈과 동시에 건물주보다 더 큰 외국인 손님이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 와우~ 우리 동네 떡뽀기 가게 있었네. 야미~ 조아요. 세바스찬도 조아?"
" 응. "
인형 같은 아들은 어묵 하나를 참새처럼 쪼아 먹는 중에, 러시아 코끼리 엄마는 오픈 준비로 가득 만들어둔 음식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 둘째 나코(낳고) 입 맛 업서 베리 헝그리 했는데 치킨 굿. 세바스찬도 마니 머거. "
한국말 보다 음식에 먼저 익숙해진 엄마는 스탠딩 파티의 묘기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는 신랑 준다며 치킨마요컵밥 두 개까지 포장하며 붉은 손톱사이에 거금을 팁처럼 끼워 지불하고는 내일 또 보자며 ‘씨~ 유~’를 남기고 떠났다.
아직 제대로 손님도 오지 않았는데, 사라진 음식들에 놀라고 있는 지콩에게 영숙이 눈을 흘기며 ' 나만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면 안 된다.' 며 그동안의 눈칫밥에 대한 복수를 날렸더니, 지콩은 조금만 더 먹으면 막상막하 코끼리를 능가하는 브라키노가 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우린 남매처럼 티격대면서도 지금 서로에게 가장 좋은 파트너인데, 우진과 정식으로 커플을 공표한 날 이후 지콩은 의도적으로 영숙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가 더 나아질 수는 없는 골목 동네 장사라 영숙은 또다시 반복되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속앓이 중이었다.
재료를 조금 더 싼 것으로 쓰는 것도, 가격을 올리는 것도 이제는 싫다. 애들 먹거리를 파는 장사라는 게 이윤만 생각할 수도 없고, 선배의 조언대로 만세가 답인 것을 영숙도 안다만, 애들과 아웅다웅 지내는 지금의 행복은 다시 느껴보지 못할 기회라 또 혼자서 낑낑대고 있다.
어른 영숙은 아이처럼 계산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사랑이 깊어지니, 조언이라는 핑계의 잔소리가 늘었다.
곱슬아,
너 또 책가방 열고 다니네. 지퍼가 왜 있는 줄 알아?
잠그라고 있는 거야!
태권 소년아,
너 또 동전 사이에 가짜 동전 끼워서 낼래?
자꾸 말썽 피우고 그러면 지콩 삼촌처럼 큰다!
중딩들아~
아직 봄 아냐. 제발 교복 좀 길게 입어라.
앞으로 똥꼬치마는 가게 출입 금지야!
지 앞가름도 못하는 영숙이 아이들에게 조언이라는 핑계로 잔소리를 해대니, 지콩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다.
너나 잘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정우의 달콤한 조언을 되새겨 본다.
하나도 안 뚱뚱해 지금 딱 좋아. 언제든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다 해 주고, 다 사줄게.
그리고,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나랑 있자. 내가 옆에서 너의 오답에 동그라미 그려줄게
아~ 이게 바로 남매와 연인의 차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