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이 Sep 11. 2024

그런 날이 있다.


졸리니 꿀꿀하다.

새벽 네시 알람이 울린다. 천근만근 몸뚱이를 일으킨다.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차가운 생수 한 모금에 몇 년 전부터  먹기 시작한 약을 털어 넣고 하루를 시작한다. 정신을 깨우려고 닿기도 싫은 물을 온몸에 껴얻는다. 헤어드라이기의 미친바람에 제대로 닦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서둘러 말리고 이곳저곳 늙어버린 얼굴을 화장으로 숨겨본다. 띵띵 부은 눈탱이에 마스카라를 날려보지만, 아! 별루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둘러 튀어나간다. 기온은 여전히 후덥지근한데 해는 가을로 접어들었는지 여명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는 아직 오픈전인데 여행에 들뜬 사람들은 이미 공항에서 부지런을 떨고 있고, 패스를 목에 건 존비들은 의욕 없는 잰걸음으로 제 구역으로 끌려가고 있다. 뭐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건지 존비들의 낯빛이 오늘따라 더 퀭해 보인다. 공항 짬밥 몇 년 차인데 나의 새벽출근은 게으른 천성 탓인가, 늘 잠에 취해 피곤에 절여있다. 아마 끝까지 이러다 퇴사를 맞이할 것이다. 노년의 긴 방학이 오면 알람 없는 늦잠을 자야지. 배고프면 일어나 마당 한편에 일군 텃밭에서 뽑아 뭔가를 만들어 먹고, 그늘진 마루에 누워 산들바람 맞으며 천만번 바뀌는 구름 구경하다 지겨우면 쓰다 그리다 놀다 낮잠 자며 빈둥대며 살아야지. 지금의 노동이 후년에 소박한 게으른 일상을 보상해 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건 어려울 거라는 걸 안다. 괜한 잡생각으로 새벽 근무만 더 꿀꿀해졌다.


강아지가 죽었다.

중국에서 인천을 거쳐 보스턴으로 가는 강아지가 죽었다. 항공기에서 내려보니 이미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승객과 떨어져 화물칸에 실려 온 강아지는 고작 생후 7개월의 덩치만 큰 보더컬리였다. 중국에서 출발할 때의 건강상태는 양호했고, 비행 중 화물칸의 적정 온도와 산소공급이 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에 처음 비행을 한 녀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생을 떠나기를 결정한 모양이다. 하루에도 많은 AVIH 들이 인천에서 환승을 하는데...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그럴 수 있다. 그게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수 있다. 살아보니 뭐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시리도록 경험하고 있으니까, 완벽은 없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주어진 일을 감정이입 없이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의 처리과정은 순조롭지 않았고, 중간 기착지에서의 법과 검역과 위생의 절차는 매우 까다로울 수 밖에 없어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국 나의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잠을 깨우려 마신 커피가 속에서 무슨 짓을 한건지 기분 나쁘게 침이 자꾸 올라왔다. 머리통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9월의 미친 날씨는 30도를 넘었고 더위속에서 떠난 강아지의 보존을 위해 드라이아이스를 잔뜩 넣어둔 컨테이너 근처에 가기가 힘들어졌다. 기다리림의 끝에 CIQ의 승인이 떨어지면 차가워진 강아지는 뜨겁게 소각 될 것이다. 혹시 모를 해외 전영병 예방을 위하여. 이승을 떠나는 것이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싸늘한 영안실에 넣어두었다가 마지막 길 활활 태워지지 않는가. 미치도록 통곡했던 그날의 아픔이 겹쳐진다.  


두 남자가 있다.

공항에 두 남자가 장기 투숙 중이다. 한 남자는 에스컬레이터 뒤쪽을 지붕 삼아 살림을 차렸다. 사방이 뻥 뚫린 그곳을 방으로 정했는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누워 자며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도 한다. 남자의 살림살이가 자꾸 늘어난다. 여행객들이 버린 가방에, 쇼핑백에, 또 무언가를 자꾸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오늘은 라이터를 켜는 건지 뭔가를 찾는 건지 한참을 요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가 더욱 시선을 끌었다. 다른 한 남자의 살림은 단출하다. 오직 푸른색 쇼핑백 하나, 겨울부터 지금까지 그것 뿐이다. 고로 남의 집 살이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낮에는 지하 1층 세탁소 앞에서, 혹은 1층 스타벅스를 등지고 서서 서서 졸고 있다가, 밤이 되면 늘 자던 의자로 돌아가 양말을 장화처럼 모양을 잡아놓고 반듯하게 누워잔다. 이렇게 두 남자는 세도 내지 않고 한여름 냉방 빵빵하고, 비데까지 설치된 공항에서 장기 투숙 중이다.



피곤에 쪄든 나는 오늘도 내일도 일할 것이다.

갑갑한 케이지에서, 광음의 항공기 화물칸에서 벗어난 강아지는 지금쯤 천국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을 것이다.

두 남자는 공항이 자비를 베푸는 한 겨울까지 저러고 개길 것이다.


용기 있는 강아지와 두 남자는 세상과의 타협을 과감하게 결렬시켜, 자유를 얻었고,

경험 많은 겁쟁이는 내일도 가느다란 밥줄은 꼬옥 잡고 피곤에 투덜대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강아지야, 천국에서 뛰놀다가 혼자 노는 아저씨 보이면 같이 놀아줘. 그 아저씨 강아지 엄청 좋아하거든.

 


수요일 연재
이전 08화 나미의 웃픈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