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최종적으로 웅이와 같은 업종을 택해 배우지 않기로 결정한 직접적인 이유를 꼽자면 나는 뭔가를 그리는 것보다 직접 손을 조물조물 움직여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칵테일이나 베이커리 업종처럼) 나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알았기에 그림 그리는 길이 아니어도 내가 무엇을 더 잘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관심이 더 많은지는 누구 못지않게 오랜 시간 고민과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최소한 그 길이 ‘그림 그리는 일’ 쪽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릿’이란 책을 읽고 과거의 선택을 되돌아보며 그 당시 내가 한 결정에 그림 잘 그리는 이들의 ‘재능적인’의 압도감이 아예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래도 남들보다 그림적인 재능이 있었던 웅이의 어릴 적 이야기의 영향이 작용을 했던 걸지도.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다행히도 찰나였을 뿐- 웅이가 작업하고 있는 것을 오랜 시간 바라오면서 느낀 건, 어릴 적 또래 아이들보다 뛰어난 그림에 대한 재능이 웅이를 지금의 위치까지 데려온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한 사람이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 가는 과정을 몇 시간, 몇 달, 1년이 아닌 꾸준히 5년 가까이를 관찰하며 지켜본 결과 절대 ‘그릿’이 없었다면 현재까지 꾸준히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책에서 말하는 ‘그릿’과 관련한 끈기, 다르게 표현해 성실함과도 비슷한 그의 작업 태도에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작업에 빠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엄청난 집중도를 발휘한다. 행사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도 어찌나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열중을 다하는지 동료 아티스트들이 아침에 본 자세 그대로 밤까지 작업하는 웅이를 보고 '화석'이라며 놀린 기억이 난다.
그림 실력은 몇 년 전과는 또렷하게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디테일이 많아졌고 구도면에서 훨씬 안정적이고, 디자인도 색다른 시도를 다양하게 해 오면서 본인만의 색깔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사실 예술이란 건 경계가 애매하고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두고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문의를 주는 만큼 그것으로 꾸준히 작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웅이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고집은 현재 작업에서도 드러나는데 놀라울 정도로 작업의 완성도를 위해 ‘디테일’을 고집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작업을 마무리한다. 작업의 완성도를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밤늦게 혹은 새벽작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재능이 아닌 ‘그릿’이 이끌고 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웅이와 웅이 가족들로부터 들은 그의 어릴 적 스토리를 조금 더 보태보자면, 웅이는 초등학생 시절 한창 또래 아이들이 바깥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던 시절에도 집에서 혼자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다소 내성적이고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아이였다.
웅이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들을 포함에 웅이네 온 식구가 알고 있는 웅이의 ‘벽지 그림’ 일화가 있다. 스케치북 사이즈로 그림 그리기 부족했던 웅이는 더 큰 그림 그릴 것을 찾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두루마리 벽지를 발견했고 그곳에 맘껏 그림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주제는 엄마와 함께 본 영화에서 본 미국의 도시들이었다.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인물을 보고 그린게 아닌 영화 속에서 본 장면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상상해 가며 채워나가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가는 매일매일 속에서 머릿속에 있는 것이 그림으로 잘 표현되지 않으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리고를 수백 번 반복하며 채워갔다고 한다. 사람들, 농구대, 카페, 샌프란시스코 브리지 등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 쏟아내는 시간들이 그렇게 한동안 흘러갔다.
최종적으로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1년에서 1년 반 가까이 걸렸다. 그 누구의 지시 없이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일궈낸 시간들이었고, 당시 웅이의 나이는 10살이었다고 한다.
웅이에게 항상 내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말이 있다. 살면서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한 말하지만 내게 있어 이처럼 단순하면서 삶의 진리인 말이 있을까 싶은 문구이다.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이란 말이다. 길고 짧은 것은 끝까지 가봐야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게 나는 인생에서는 특히나 더 적용된다고 믿는다. 이 글귀는 나의 인생 신조처럼 강력한 믿음이기에 다시 한번 스스로를 위해 곱씹어 본다. 타고난 재능과 환경이 인생의 단거리 달리기를 위한 무기라면 그릿은 마라톤을 뛸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