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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는 뭔데

by 메이다니

“근데...”

이 한 글자짜리 부사에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이 담기게 된 걸까.


그냥 단어 하나인데, 사람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경우에 따라선 살짝 분노하게까지 만든다.

근데는 마치 대화 속에 끼어드는 회색 구름 같다. 밝아질 듯하다가 먹구름이 끼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수도 있는.

그리고 그 소나기의 종류는 언제나 예측불허다.





시작은 늘 조심스럽다


누군가가 내게 “근데...”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춘다.

이제 뭔가가 나오겠구나.

그것이 칭찬일지, 지적일지, 충고일지, 불만일지.

근데는 본론을 예고하는 신호음이다.


“오늘 PT 발표 잘했어. 근데 자료 순서가 좀 아쉽더라.”


“이번에 옷 되게 예쁘다. 근데 살이 조금 찐 것 같아.”


“나 너한테 서운한 건 없어. 근데 그날은 너무한 거 아니었어?”


어떤가.

근데가 나온 순간, 앞에 있던 칭찬이 다 지워진 느낌이다.

사실 칭찬은 그냥 근데를 꺼내기 위한 완충제였던 것 같다.




근데는 기본적으로 반전이다.


앞의 말이 어찌 됐건, 나는 지금부터 다른 말을 하겠다는 선언.


더 정확히 말하면, ‘네 말도 알겠어. 하지만 내 말은 이거야.’


예를 들어 보자.


"너도 나름 고생하는 거 알아. 근데 이번 프로젝트는 네 실수가 커."


"내가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근데 이건 좀 선 넘은 거 아냐?"



이쯤 되면 근데는 일종의 말하기 면허다.

내가 지금부터 불편한 얘기를 해도 괜찮을 수 있도록 허가를 얻는 장치.

‘네 입장도 아는데, 내 말도 들어봐’라고 포장하는 것.





근데 비겁한 건 아니?


솔직히 말해보자.

근데를 쓰는 사람은 꽤 교활하다. (나 포함)


왜냐면 근데는 나쁜 소리를 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게 만들어 준다.


"너를 욕하려는 건 아니야. 근데 넌 좀 이기적이긴 해."

이런 식이다.


이건 거의 언어적 회피술이다.

‘내 말은 공격이 아니야, 단지 피드백이야’라는 면피.


게다가 근데를 잘 쓰면,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균형 잡힌 사람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사람처럼.

그래서 우리는 이 작은 부사를 대화 속에서 자주 소환한다.





근데는 때로 날카롭다


진짜 상처는 이럴 때 온다.


“나는 널 믿어. 근데 이번엔 정말 실망했어.”


“니가 노력하는 거 알아. 근데 그건 기본 아니야?”


이런 문장 앞에서는 누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근데가 들어가는 순간, 말의 무게가 확 바뀐다.

앞의 문장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할 거면 앞에 그 얘기는 왜 한 거야?”


속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근데 나도 쓴다


그렇다. 나 역시 근데의 유저다.

심지어 오늘도 썼다.


친구가 고민을 털어놨을 때.


“아니야, 넌 잘 하고 있어. 근데 너무 네 탓만 하지 말고…”


내가 그 말을 하고 나서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 친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런 글을 떠올렸을 것이다.





근데 변명하자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 아니, 근데라는 말 없이 어떻게 대화를 해?

균형 맞추려고 쓰는 거잖아.




맞다. 때론 근데가 꼭 필요할 때도 있다.

논리를 전개할 때, 의견을 조율할 때, 감정이 너무 격해지는 걸 막을 때.

적절한 근데는 갈등을 줄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면피용으로 습관처럼 쓰는 것이다.

"난 욕 안 했어. 그냥 근데라고 했을 뿐이야."

이렇게 빠져나가면, 상대방은 혼자 상처받는다.





나는 오늘도 근데를 해부한다


말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

**‘근데’**처럼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도 드물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며 다짐한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근데를 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자고.

이 말을 굳이 해야 하나?

내가 말하는 이 근데가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그냥 내가 불편한 말을 피하려고 대충 둘러대는 건가?




근데는 뭔데?


그건 결국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솔직함을 살짝 덮어주는 얄미운 부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근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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