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없는 적폐와 공갈빵 : 청주 상당구 구도심
페이크 다큐멘터리 3일
- 1일차 : 2020.5.7(목)
연택은 청주 SK하이닉스 3공장에서 오전 10시 미팅이라 서둘러 집을 나선다. 경기광주역에서 경강선을 타고, 이매역에서 수인분당선으로 갈아타고 수서역 SRT를 타러 간다.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하는 연택은 발걸음이 한껏 가볍다. 미팅이 잡히자마자, 오른쪽 창가자리를 예매했다. 하행선은 아침이면 왼쪽 좌석 창가의 커튼을 내려야 해서, 연택이 애정하는 '기차멍'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마을호가 기차멍 하기에는 딱이지만... 뭐 그래도 SRT는 빨리 가니...’
연택은 부산에 있는 형을 보러 갈 때, KTX구간이 완성되지 않아 새마을호 속도로 달리던 시절을 좋아했다. 하염없이 창박을 바라보며 강제적으로 뇌를 쉬게 하는 것을 즐겼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곧 출근 하게 될 삼성전자공장이 스쳐 지나간다.
미팅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니, 신영, 푸르지오, 두산위브까지 지웰시티 아파트들이 웅장하게 서있다. 충북권에서 유일한 메이저 백화점이자, 충청권 유일의 현대백화점을 끼고 있다. 지웰시티 아파트 주차장에서 611번 버스를 기다린다. 연택은 청주까지 내려온 김에, 오후 반차를 내고 자신만의 여행을 준비해 뒀다. 청주의 오래된 구도심을 걷고, 50년 넘은 노포인 <중앙모밀>로 점심을 먹는 것.
무심천을 건너 구도심으로 들어섰다. 평일 점심 시간인데도 대기 줄이 있다. '제대로 찾았구나' 하고 연택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번호표가 있는지 확인하고, 대기줄에 선다.
“저... 혹시? 연택님?”
“네? 아, 저 연택 맞는데요.”
“아, 저 경석이에요. 연수원에서 같은 방 썼었던.”
“와... 경석님! 이게 얼마만이에요?”
일단 최대한 아는 척을 해 본다. 얼굴이 명확하지는 않았만, 그의 진지한 수다스러움이 기억속에 잠시 올라왔다. 까만 뿔테 안경에 새 하얀 얼굴은, 청주의 구도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평범한 화이트 셔츠에 손석희 아나운서가 차던 은색 카시오 손목시계, 그리고 유니클로로 추정되는 밑단이 짧은 치노팬츠 아래로 특이한 무늬에 검빨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고있다. 집에 투명 아크릴 신발 정리함이 있을것 같은 느낌이다.
“연택님도 청주에 근무하세요?”
“아니요, 저는 이천본사에서 근무하는데, 오늘 미팅이 있어 내려왔다가, 미팅 끝나고 여기 모밀먹으러 온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청주사업장에서 근무해요. 1공장에서."
“혼자 오신 거면 같이 먹어요. 대기도 줄어들 테니.”
“좋죠. 오후에 외근이 있어서 일찍 나왔는데, 여기 모밀이 생각나서 왔어요. 부동산 가봐야 하거든요. 날도 더워지니 무조건 모밀이죠? 판모밀 드실 거죠?”
‘무슨 외근을 부동산으로 가지? 내가 다 정해왔는데, 메뉴까지 정해주는 건 뭐람. 아... 나만의 여행이 또 이렇게 방해를 받는군.’
연택은 갑자기 튀어나온 수다스런 경석이란 불청객이 달갑지만은 않다.
“저는 청주로 발령받아서 여기 내려온 지 한 2년 정도 돼요."
“아. 그러시구나, 근데 외근을 부동산으로 가세요?”
“연택님, 혹시 부동산에 관심 있으세요? 저는 여기서 직원들 사택관리 하고 있거든요. 부동산 소장님들 만나는 게 일이다 보니까, 저도 자연스레 부동산 관심 갖게 됐어요. 투자도 몇 개 하고. 3공장 앞에 높은 아파트들 보셨죠? 거기가 청주에서 젤 비싼 동네예요. 제가 복대동처럼 부자동네 살 수는 없고, 봉명주공 2단지라고 35년 된 아파트에서 몸테크 하고 있어요. 저 사는 동은 심지어 2층짜리예요. 앞에 잔디밭도 있고, 이거 봐봐요. 이게 우리 집에이요.”
'정말 2층짜리 아파트가 있구나...' 연택은 사뭇 놀랐다. 2023년에 이런 아파트에 산다는게, 이게 몸테크란 것이구나. 황급히 화제를 바꾼다.
"근데 사택은 회사에서 집을 주는 거예요?”
“회사에서 대신 전세로 직원들한테 주는거에요. 전세권설정하고. 보통 30평대 세 명 정도 같이 살게 해요. 한 10년~15년 차 아파트들, 청주사직푸르지오캐슬 1단지하고 4단지 쪽에 좀 몰려있어요.”
“아… 그렇구나…”라고 얘기를 하면서도 연택은 도통 모르는 얘기를 계속하며, 이 맛있는 판모밀을 음미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뺐고 있는 경석과의 우연한 점심식사에서 언제 벋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저는 서울에서 여기 혼자 내려와 있다 보니, 할 일도 없고, 맡은 일도 그렇고, 자연스레 부동산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집 소개해주신 봉명주공 앞 <명진부동산> 사장님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투자도 몇 개 했어요.”
“몇 개요…? 집을요? 몇개나요?”
“뭐... 연택님도 부동산 한번 관심 가져 보세요. 월급쟁이를 탈출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에요. 제가 투자한 게, 모충청송이라고 94년 입주한 구축아파트가 있어요. 바로 그 옆에 LH트릴로채 1,700세대 한참 짓고 있어요. 완공되면 트릴로채의 상가와 시설은 다 공유하는 거죠. 그거 제가 작년 8월에 갭 800만 원에 샀거든요. 지금은 4천만 원 정도 올라있어요. 그니까 제 돈 들어간 건 없죠.”
“네? 800만 원에 집을 산다고요?”
‘와아. 이게 말로만 듣던 갭투자구나…’ 연택은 슬슬 전두엽이 활성화되면서, 투자자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한국은행 충북본부 쪽 <서원다실>에서 쌍화차 두 개를 시킨다. 주인 할머니가 어느 정도로 달게 해 주는지, 노른자는 띄우는지 물어보신다. 적갈색의 두툼하고 투박한 연꽃 무니 찻잔에 노른자를 둘러싼 잣들과 대추가 쌍화차 위에 아름답게 떠있다.
“연택님, 진짜 부동산 공부 한번 해보세요. 재밌어요. 돈 버는 재미도 있고, 부자 된 것 같은 느낌도 있고 그래요.”
“저는 경석님이 집 몇 채 있다길래, 원래 돈 많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근데 800만 원에 집 샀다고 해서 진심 깜놀 했어요.”
“저 여기 청주에 혼자 내려와서 돈쓸데도, 여친도 없다 보니, 돈이 꽤 모이더라고요. 봉명주공은 주담대 끼고 사고, 모충청송은 갭 800에, 모충주공 2단지는 옆에 사직동이 재개발 들어간다 해서 투자했죠. 이주수요도 보고, 갭 3천에 샀고요. 그리고 지난달에 오창에 롯데캐슬더하이스트는 갭 6천에 계약했어요.”
“와 경석님 진짜 완전 투자자시네요”
“연택님, ‘방사광가속기’라고 들어봤어요?”
“네. 포항에 있는 거요? 학교 다닐 때, 뇌 신경망지도 연구실습차 한번 가봤어요. 근데 그게 왜요?”
“오! 역시, 카이스트 출신 답네요. 아니, 이게 1조 원대 국책사업이거든요. 지금 청주, 나주, 춘천, 포항 등 4곳서 유치경쟁을 하고 있어요. 근데 청주사람들은 여기 오창에 들어올 거라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창에 전국 투자자들이 몰리고. 제가 산 오창롯데캐슬은 계약하고 한 달도 안 됐는데 4천만 원 올랐네요. 매도인 잔금 칠 때 배 좀 아플 듯하네요.”
“네??? 한 달 만에 4천만 원이요???”
“원래 오늘 발표 예정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 보니 쪼금 불안하긴 하네요. 호재로 오른 건 또 순식간에 빠져버리니까요. 근데 오창으로 선정되면 내일이라도 물건 알아보러 한번 와봐요.”
집으로 돌아오는 SRT기차 안. 이미 깜깜해져 창밖은 볼게 없어졌다. 경석이 하염없이 나불댔던 알 수 없는 얘기들과, 돈을 쉽게 버는 듯한 느낌의 부동산 투기 또는 투자. 800만 원으로 4천만 원을 벌고, 6천만 원 투자해서 한 달 만에 4천만 원이 오르고. 연택은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기차멍을 위해, 수서역까지 48분 동안 기차를 타겠다고 구도심에서 502번 버스를 타고 50분을 달려 오송역으로 왔다. <크리스피크림>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산다. 「제빵왕김탁구」의 배경이었던 수암골 <팔봉제빵점>에서 사 온 공갈빵을 먹으며 17:17 출발 SRT346 기차를 기다린다.
경석은 뿔이난 빨간 악마 같은 '부동산적폐'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불로소득으로 치부되는 경석의 미확정 수익이전에는, 몇만 시간의 공부와 몇만 보의 임장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연택은 부동산 투자자는 적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예진이 부동산에 빠져있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뿔이 없어 보였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싶지만, 자신은 적폐가 될 수 없다는 연택의 이중성과 양면성.
‘와사삭’ 공갈빵 한입을 베어 문다. 안이 텅 비었다. 그러니 공갈빵이지. ‘와사삭’ 하는 소리는 전전두피질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던 연택의 장기기억을 불러온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처럼 금이 간 공갈빵을 보며 생각한다. 어떤 게 진짜 세계인가?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건네던 ‘모피어스’의 얼굴에 경석이 오버랩되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연택은 자신이 ‘네오’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