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한방과 우직한 결정 : 영등포구 영등포동
형을 만나고 대전에서 수서로 올라오는 기차 안. 선반 위에 올려놓은 <성심당> 튀김소보로와 판타롱부추빵이 섞인 묘한 냄새가 ‘토그닥 토그닥’ SRT의 고급스러운 먹먹한 진동과 함께 연택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연택은 고등학교 이후로 이내 떨어져 살았던 형 생각에 잠긴다. '내가 편히 아부지 어무이 밑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 형은 이 빌라 저 빌라를 옮겨 다니며 그렇게 성악가의 길을 걸어왔구나.'
'연태가, 내 요 철도아파트 보니, 우리 살던 ‘남서울아파트’ 생각나네. 니 그 함 가봐라. ‘신길10구역’ 그기이 47년 만에 관리처분인가 나고 지금 이주기간이라 카이. 뿌솨뿌기전에 함 가봐라. 가서 사진 한 장 보내도. 보고 싶네 울지비!'
연택은 어제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서, 거실에서 멍하니 음악을 들으며 맥주 네 캔을 마셨다. 몇 년 만에 만난 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연택이 몰랐던 형이 빌라 인생과, 부동산 재개발 얘기를 뇌의 장기기억에 담아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요일 오전 11시 30분. 예진이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 깨고 만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연택이 베란다에 매달아 놓은 새장에 참새들이 먹이를 가지고 싸우는 ‘푸드덕, 짹짹’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서재에서 모니터로 호갱노노를 보고 있던 예진이 콤부차를 들고 연택앞에 와서 앉는다.
“아버님은 어떠시대? 또 연락 온 거 있어?”
“아니. 아직. 내일 돼봐야 알듯 해. 어제 엄마가 아부지 병실에 있는 사진 카톡으로 보내주셨었는데, 살이 쫙 빠진거 보니까, 나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생각나더라고. 그때는 병원이 아니라, 그냥 집에서 돌아가셨거든.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뼈밖에 안 남은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데… 아버지 그 사진에서 그 모습이 보이더라고. 이거 봐봐.”
예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늘 건강하게 웃던 아버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 하고도 얘기했어. 아버지 어떻게 모실지에 대해서도.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할아버지 계신 합천 선산에 가는 건 싫다고 하셨던 것 같다고. 찾아오지도 않을 거라면서 뭐 하러 그 시골에다 나를 두냐고. 그땐 너무나 먼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빠. 우리가 벌써 그럴 나인가 보다.”
“여하튼 뼈밖에 안 남은 모습이 좀 그랬어. 형이랑도 이 얘기하다가, 형이 커서는 아부지 제대로 노래하는 거 들어본 적이 없다고 아쉬워했어. 초등학교 때 왜, 엄마아빠들 송년모임 같은 거 했었잖아, 그때 들었던 ‘비목’ 밖에는 없다고 아쉬워하더라고”
“아버님도 노래 잘하셨어?”
“주택이 형이 괜히 성악과 갔겠어? 나는 아주 쪼끔 물려받은 듯하고. 여튼 그래서 아부지와 주택이형은 너무 비슷해서, 더 안 친했을 수도 있어.”
연택은 주택이형이 부산에 내려가 ‘재개발 천재’가 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택의 세련된 조폭 같은 모습과 성악가가 부캐고, 부동산 투자자가 본캐처럼 느껴졌던 것, 그리고 형과 함께 ‘선화1구역’, ‘은행1구역’ 대전역 뒤 ‘중앙1구역’을 돌아본 것을 마치 카이스트에서 정재승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나서 얘기한다.
“난 진짜 우리 형이 그럴 줄은 몰랐어. 그냥 노는 거 먹는 거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게 일이고, 한량같이 안분지족 하는 삶을 사는 줄만 알았는데... 글쎄 꿈이 스타벅스 건물주래. 한대 얻어맞은 듯했어.”
연택도 스타벅스 건물주가 되고 싶다며, 형한테 재개발도 배울 거라면서 의지 뿜뿜 하며 얘기한다.
“형이 부산 한번 내려오래. 재개발 임장 시켜주겠다고."
"재개발 천재 아주버님이라니. 상상이 잘 안되네. 그나저나 요즘 뉴스에 나오는 그 '빌라왕'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정도 일까...? 여튼, 수영구 쪽에 초기 재개발이 1억 미만으로 투자가 가능하다는데, 함 가보자~! 가서 물어보지뭐. 형 '부산 빌라왕'이냐고... 언제 시간 돼?”
“응, 그래. 난 7월 1일 주말에 괜찮아. 1박 2일이야?”
“그럼 7월 1일~2일로 형한테 물어볼게. 형도 보고 대선소주에 회도 한사라 하고. 울 형이 또 미식가자나. 맛난 거 많이 먹고 오자!”
잠깐 졸고 일어났더니 날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오후 7시. 하지를 지난 게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은 일몰이 아닌데. 비가 오려나 보다. 잠시 잠에서 깨는 듯 마는 듯하는데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 비 오네? 오늘 비 온다고 했었나? 오빠, 저녁은 감자전이랑 김치비빔국수 해 먹자~!”
청양고추가 송송 올라있고 끄트머리가 바싹하게 갖구워진 감자전을 한입 먹고, 와인잔에 따른 <이화백주> 막걸리를 한 모금 한다. 알싸한 맛의 샴페인스러운 활기찬 기포가 입안을 감싼다.
“예진아, 나 다음 주 토요일에 우석이 결혼식 가야 돼.”
“아! 맞다. 어디서 한다고 했지? 왜 구글 캘린더에 안 넣어놨어? 같이 가는 거 아녔어??”
“아, 신도림 디큐브시티 건너 <베니비스>인가? 자세히 함 봐야겠다. 아니 그게, 석준이도 와서 그냥 서로 불편할까 봐 그래서 그랬지.”
“아냐 괜찮아. 안 불편해. 뭐... 우리가 잘못한 건데. 석준오빠는 잘못 없지. 근데 꼭 없다고도 할 수는 없네. 헤헤...”
“지난달에 중학교 동창 모임 갔다 온다고 했었잖아, 우석이가 청첩장 준다고 해서 오랜만에 그냥 셋이 만났어. 워낙 친했으니까. 근데 석준이 그 자식, 연락 안 되던 3년 만에 아주 그냥...”
연택은 <이화백주>를 예진의 잔에 마저 따르며 잠시 숨을 고른다.
“그놈이, 비트코인으로 전재산 다 날리고 개인회생까지 갈 뻔했는데, 집담보 잡아서 겨우 여의도 집은 건졌다고 하더라고. 그 뒤로 보험개발원에서도 나온 건지 짤린 건지... 여하튼 겨우 남긴 돈으로 스터디카페 했던 모양인데, 그것도 코로나 때문에 잘 안되고, 요즘은 새로운 거 찾고 있나 봐.”
“아 그랬구나. 그래도, 담보대출이라도 나와서 다행이다.”
“그리고, 석준이는 뭐 자세히 얘긴 안 하는데, 우석이 말로는 돌싱 됐다곤 하더라고. 요즘 강아지랑 ‘나혼산’ 찍고 있다면서. 인스타에서 아주 진상이래. 난 인스타 안 해서 모르는데 그래도 둘은 가까이 있으니까 가끔 봤었나 봐.”
“우석오빠도 여의도 살아?”
“아니, 우석인 가산디지털단지 쪽에 회사 다녀서 그쪽 어디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었을걸?
“아 그렇구나, 그럼, 신혼집은 어디래?”
“아, 그게... “
한 달 전, 셋은 영등포 <부일숯불갈비>에서 만났다. 우석은 공공지원 민간임대 아파트인 "개봉역 센트레빌 레우스"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연택은 2억에 40만 원 정도만 내면 된다고 좋아하던, 우석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자산으로써 아파트의 '묵직한 한방'을 이미 알고 있는 석준이 살짝 취기가 돌았는지, 중딩시절의 쌍욕을 해가며 우석에게 정신 차리라고 얘기를 해댔지만, 우석은 한번 내린 '우직한 결정'을 절대 바꿀 생각이 없었다. 연택은 색종이 크기의 돼지껍데기를 한입 크기로 무심히 자르고 있다.
길거리에 거의 나 앉을 뻔한 석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야 임마! 뭐? 8년 임대? 그럼 입주 3년 지났으니, 이제 5년 남은 거자나? 그럼 그 뒤엔? 월세 쪼금내고 신축아파트 역세권에 산다고 좋냐? 그게 지금 마흔 넘어 결혼한다는 놈이 할 소리냐? 2억 보증금 있으면, 차라리 작고 쪼그만 아파트라도 들어가라. 제발, 응? 그래야 5년 뒤에 어디 옮겨 가기라도 하지. 5년 있다 보증금 돌려받으면 그 돈으로 갈 수 있는덴 없어 임마! 평생 임대아파트만 돌아다닐 거냐? 응? 우석아!”
석준도 우석도, 둘다 연택을 쳐다본다. 철판 한켠의 못다 먹은 양념갈비는 하얗게 변한 숯불 위에서 새카맣게 쫄아들고 있었고, 돼지껍데기는 노오랗게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곧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자~자~! 됐고! 한잔해~" 연택이 쏘맥잔을 들어 올린다.
"각자도생이야. 뭘 그리 배놔라 감놔라 하냐!"
‘펅!’ 터진 돼지껍데기가 철판에서 튀어 오르더니, 인절미 콩가루 접시에 떨어지면서 석준의 감색 ‘처음처럼’ 앞치마에 콩가루를 흩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