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희
그것이 싹이 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날 싹을 틔우더니 쑥쑥 꽃대가 자랐다. 윗동만 남은 무에서 새순이 줄기처럼 자라는 것을 보면 가슴 속 어디선가 잃어버렸던 기운이 솟는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론 옆구리가 시리기도 했고 트림을 할 땐 매운 무 냄새가 났다.
튼실한 무 하나를 숭덩숭덩 잘라서 무국을 끓여먹고 볶아서 무나물 해먹고 고등어조림에 넣어먹고 그래도 윗부분이 조금 남아서 음식쓰레기로 버릴까 하다가 흰 사발에 올려놓고 물을 조금 채워 본 것이다.
도대체 어떤 꿈을 꾸길래 며칠을 미동도 하지 않다가 허공에 존재를 드러내는지 그것의 속내가 궁금했다. 어차피 무라고도 호명할 수 없는 토막일 뿐인데 무슨 미련이 남아 새순을 밀어 올릴까.
갑자기 엄마한테 들었던 솔방울 얘기가 생각났다. 소나무의 솔방울은 씨앗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소나무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씨앗에 대한 열망이 강했으리라. 나의 엄마도 마지막 남은 씨앗 하나 지키려 했던 계절이 있었다.
사업이 망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작은오빠를 위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어디서나 무탈하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손바닥을 비비며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에게 자식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여섯의 자식은 늘 뒷전이었다. 중얼거리며 걸어다닐 때도 기도문을 외웠다. 부엌에서 도마에 무를 올려놓고 칼로 쓱쓱 자를 때도 작은오빠 생각을 하다가 손가락이 베여서 오랫동안 검지손가락을 친친 감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엄마가 중얼거리며 그렇게 먼 산을 보던 시절이 또 있었는데,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도회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좋은 논밭을 팔아 공동묘지 근처 싹산이라는 곳의 산을 샀을 때였다. 그 산 밑에 거친 밭이 제법 있었는데 그 밭에는 무를 심곤 하셨다. 어느 해인가는 무 농사도 제대로 안 된다며 길쭉한 단무지 무를 심기도 했다. 심은 것을 수확하는 날이면 으레 아버지는 만취해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무청 시래기처럼 시들시들해져 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환경조사서에 종교를 쓰는 것이 있었는데, 증산도라고 썼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생각하는 뜻을 응원해 주고 싶은 나의 작은 마음의 표시였다. 서툰 글씨로 쓴 세 글자라도 그때는 그랬다. 뿌리 깊은 유교 집안에서 혼자서 외롭게 증산도를 믿는 엄마 편이 되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매일 정성들여 기도를 했다. 밥을 거르는 적은 있어도 기도를 잊으신 적은 없었다. “엄마, 뒷집 아줌마처럼 새벽예배에 안 나가고 왜 장독대에서 기도를 해요?”하고 내가 묻자 맏며느리라서 집안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산도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종교라고 했다. 교회를 가면 조상은 안 모시고 하나님만 모시고 제사는 안 지낸다고 했다.
우리 집은 6대조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 때문에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제사음식을 장만하셨다. 게다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와 까다로운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엄마는 쉴 새가 없으셨다.
그뿐인가! 아버지 밑으로 시동생들이 줄줄이 여섯이나 되니 엄마 가슴이 멀쩡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뭐든지 자식보다 시동생을 먼저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사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4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게 된 것도 막내인 내가 어렸을 때에 결정된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증산도가 동학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양상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엄마랑 손병희 동상을 보러 관광버스를 타고 갔던 적이 있었고, 지붕 위로 기러기가 풍경을 가로질러 갈 때에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하고 엄마와 노래를 함께 불렀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는 무청 시래기처럼 마르는 것이 아니라 그늘이나 어두운 곳에서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씨앗이 발아하는 조건과는 다른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시부모님 모시고 시동생 여섯과 자식 칠남매를 키운다고 엄마는 속이 푹푹 썩어 들어갔던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가부장적인 유교적 제도에 혼자서 죽창을 들 듯이 증산도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각났을 땐 하얀 사발 속에서 무가 꽃대를 제법 죽창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쳐들고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을 때였다.
다음 날 아침, 꽃 두 송이가 폈는데 놀랍기만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 피어올린 연분홍 꽃잎은 네 장이었다. 꽃잎 가운데엔 노란 수술도 있었다. 언뜻 보면 꽃잎이 나비 같았다. 엄마가 나비처럼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며칠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내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들어오는 사이에 무는 사발에서 숭고함을 꽃 피우고 있었다.
문득 무꽃과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알았다. 꽃대가 허공으로 꽃을 피어올린 것처럼,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썩고 시든 몸뚱이에서 꽃이 피었다 지고 또 피었다 지는 모습은 엄마의 살아온 나날이라는 것을. 그런 무꽃이 엄마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꽃이 핀 흰 사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물을 적당히 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가 꽃등 하나 들고 내 앞을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의 길을. 내 몸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너도 소망을 밀어올리고 꽃을 피워보라는 듯이. 우리는 썩기에 좋은 몸의 구조를 갖고 태어났다고. 살다보면 몸이 썩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꽃은 피는 거라고.
무꽃과 나는 묵언을 오래도록 나누었다. 무꽃이 식탁 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 <종이배에 별을 싣고>, 곰곰나루, 2024, 216~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