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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숙 Oct 21. 2023

항심

고요와 평온

우리 집 앞에는 작은 화단이 있다. 그 화단에는 30년이 지난 나무가 있고 대체로 20년이 지난 나무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늘 많은 새들이 날아든다. 그리고 그 새의 지저귐은 즐거움을 준다. 유난히 시끄럽게 들릴 때가 있는데 아마도 나무에서 먹을 것을 두고 다툼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많이 올 때이다. 바람 때문이 라지만 저렇게 흔들리는 나무에는 새도 둥지를 틀 수 없으리라... 사람의 마음도 저렇게 흔들리면?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크고 작은 풍파를 겪는 것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 형태와 크기가 다를 뿐..


몇 년 전 전국체전이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다. 나는 응원 단장으로 우리 팀을 위한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아이들과 응원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손뼉 치며 응원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함께 방을 써야 하는 다른 이사가 대뜸 하는 말이 "돈 벌기가 참 힘들어." 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너무 나쁘고 속으로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내가 돈 벌려고 응원을 하는 줄 아냐. 내게 맡겨진 임무니까 하는 것이고 그러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우리 팀을 응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그 이사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싫어서 밖으로 나왔다. 늘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날은 유독 더 눈에 거슬렸다. 늘 이기적인 행동으로 남의 눈을 찌푸리게 했던 것이 다반사였는데 나에게 했던 그 말은 정말 화가 났다. 모든 것을 돈과 결부시키는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나의 모든 행동이 값어치가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화가 났다. 


해마다 나는 응원단장으로 전국체전 때마다 응원을 하라는 회장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고, 난 그 일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실제 응원의 힘은 짜릿할 만큼 컸다.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역전승을 하기도 하고 메달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가 은메달을 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짜릿함이 나를 흥분시켰고 마치 내가 선수가 되어 뛰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응원을 하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러나, 해마다 바뀌는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 응원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난 더 이상 응원단장으로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을 응원을 해왔기에 모두가 나만 보면 응원을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한다. 그리고 모두 아쉬워한다. 지금은 아무도 나서서 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내가 정말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말이 뭐라고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그깟 말로...  아마도 내게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동안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속으로 화가 났고,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가 않다. 그래서 볼 때마다 가볍게 인사만 하고 말을 섞는 일은 애써 만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느끼면서 내가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한다. '고작'이라는 말이 나를 휘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좁아진다. 누군가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속으로 즐겼다. '이 사람도 그 사람을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거기에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친다. 내 마음이 더 즐거워졌다. '이 사람도?' 그렇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심한 욕설까지 섞어가며 흥분된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순간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0이 넘은 그 나이에 남들에게 저렇게 심한 욕을 먹는다는 것이 손주들도 있는 할머니인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말에도 누군가 영향을 받는다면 이왕이면 좋은 말로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말 한마디라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적어도 남의 말 한마디에 출렁이는 마음을 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고달플 때 특히나 더 남의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 오래도록 그것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영혼에게 너무 미안한 행동이다. 나의 영혼까지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이렇게 인간관계에서든 돈에 관해서든 또는 질병에 관해서든 좋고 나쁨을 반복하며 겪어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도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근심 걱정이 없는 최고의 허락된 평온함이야말로 모두의 바램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평온함을 원하지만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마음이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무게와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변하려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수시로 바뀌는 마음이 어느 때는 가볍고 어느 때는 무겁다. 온갖 근심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우면 다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몸도 천근 만근이 된 듯 따라서 무거워짐을 경험해 보았다. 마음이 무거운 것을 그 상태로 오래 두면 그것은 병이 되어 몸으로 나타나게 되고, 근심 걱정이 사라져 마음이 가볍게 되면 표정이 밝아지면서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의 크기를 말할 때 "마음이 넓을 때는 바다와 같고 좁을 때는 바늘귀보다 좁다"라고 한다. 내 마음도 그렇게 수시로 변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의 무게에 따라 달라짐을 느낀다. 마음이 무거우면 한없이 좁아지고 마음이 가벼우면 너그러움에 한없이 넓어지기도 한다. 결국 마음의 무게를 조절하게 된다면 마음의 크기도 자연히 따라서 달라지리라.


그런 마음의 무게는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까?


뜻하지 않은 불상사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내몰리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있을까?


'항심' 출렁이지 않고 고요하며 평온함으로 유지될 수 있는 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리고 경험상 아마도 그 방법이 있다면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마음의 중심에 감사와 사랑을 담아두면 회오리치듯 요동치는 마음은 주변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느껴 보았기 때문이다.


심한 바람에 파도가 일렁이더라도 깊은 바다는 늘 고요하다. 태풍이 불어 가벼이 박힌 나무의 뿌리는 뽑히더라도 땅속 깊이 박힌 나무는 가지는 꺾이더라도 뿌리가 뽑히지는 않는다. 살면서 내게 부는 바람이 나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었을까?  모든 나무의 뿌리를 다 뽑아 버릴 것 같은 태풍에도 버틸 만큼 든든하게 지탱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갖게 해 주었을까?


그런 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이 깊은 바닷속의 고요함과 태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생각을 한다. 흥분되는 상태에 사랑하는 마음을 넣으면 더디더라도 가라앉았고, 화가 나는 나의 마음에 감사한 생각을 넣으면 그래도 사그라들었다. 그것이 아직 미숙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그 방법이 맞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랑과 감사의 그 마음을 더 키워갈 수 있도록 그때그때 노력을 한다.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시키듯, 웃는 것으로 마음을 단련시킨다.

'항심' 매일 매시간마다 단 몇 분이라도 웃는 것으로 마음의 평온함을 가지려 하고, 지금의 시간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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