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prologue)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과연 이 글을 마지막까지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내 삶의 흔적이며 동시에 지우고 싶은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탈고되어 세상 속으로 나온다면 어려운 시간 견뎌준 아내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2007년 이제 막 더위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6월이었다.
태어나 첫 생일도 보내지 못한 막내아들을 포함해 3명의 아이와 집사람을 남겨둔 채 홀로 울산의 조선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표현이 정제되어 근무한다는 것이지, 하던 사업 말아먹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그런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저 혼자 살겠다고 마치 도피라도 한 것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일이 상대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초라해지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돌아갈 차비를 포함해 3만 원이 전부였던 나는 외국인 숙소에서 처남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묶고 있는 숙소에는 6명의 필리핀 노동자 외에도 유일한 연고자였던 처남이 살고 있었다.
처남은 그들을 관리하는 조건으로 묶고 있었으나 '나'라는 혹이 생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나와 함께 자취를 시작하였으며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울산의 조선소에는 오후 6시가 지나면 그곳을 빠져나오는 오토바이 행렬을 볼 수 있다.
단순히 행렬이라고 했지만, 그 모습은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모습일 테고 나 역시도 그것을 처음 접했을 때 경이롭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는 모습이 마치 오토바이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쓰고 있는 동남아의 모습 같기도 하다.
차도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이 끝날 때쯤 이번엔 인도 쪽이 같은 모습으로 장관을 이룬다.
모두가 같은 복장으로 한 곳을 향해 걷지만, 그들의 인상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묻어있다.
어떤 이는 밝게 웃으며 이후 시간을 만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는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표정이기도 하다.
그런 군중 속에 유독 힘에 부쳐 허덕이는 사람이 보인다.
종대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얼마 전까지 잘 나가는 학원을 운영하던 학원장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두 가지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김의영 아저씨는 젊어서 조직 폭력배 생활했다고 하셨고, 김 반장님은 우슈 체육관을 운영하시던 관장님이셨으며 정화 형님은 음료 회사 영업부장을 하시다 오셨다고 하셨다.
저마다 말하지 못하는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저들은 LUG 반이라는 곳에 모여 생활하였다.
반장은 김의영 아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시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하시는 모습을 좋아할 관리자는 없기 때문이다.
“의영형님! 제가 오늘 중으로 마무리하셔야 한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자꾸 이렇게 하시면 남은 일은 누가 합니까?” 오늘도 김 반장이 또 한소리를 해 보지만 의영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들어온 소리가 아니라는 듯 대꾸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둘러 퇴근하셨다.
“하여간 저 형님도 참…. 아휴 내가 언제고 자르고 만다.” 김 반장은 악담을 하긴 하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루는 의영 아저씨가 말도 없이 결근하셨는데 사장님에게 자신이 조퇴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무단결근은 당일 일당은 물론이고 주차와 월차까지 사라지는 엄청난 피해가 따른다.
김 반장의 거짓말은 의영 아저씨의 3일 치 일당을 지켜주는 결과가 대기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3일은 무게감이 다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는 사람들인데 주말을 빼고 나면 족히 일주일을 살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적어도 3만 원이 전부였던 종대에겐 그랬다.
다음날 의영 아저씨는 고맙다는 말 대신 김 반장의 어깨를 한번 툭 치는 것으로 대신에 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김 반장이 자신의 자리로 개인 면담 요청해 왔다.
A4용지를 반으로 자른 종이를 다시 반으로 접은 A6 크기의 종이 한 장을 내밀며 '고생했다'라는 짧은 덕담을 건넸는데 뭐랄까 뭉클하다고 해야 하나 인정받았다고 해야 하나 종대 씨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으로 목이 멨지만 참았다.
얼마 전까지 주던 사람의 입장에서 하루아침에 받는 사람의 입장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종대 씨는 그렇게 첫 월급을 받았고, 그의 시급이 5,500원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보통은 근무 전에 자신의 시급이 얼마인지 사전에 통보받고 합의한 후 근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한 달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만의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달 먼저 온 선임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었고, 함께 근무하는 처남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알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힘들다고 그만둘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시급이 얼마가 되었든 수입이 생기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더욱이 합리적인 대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수년 동안 이직 없이 머물지 않을 테니 말이다.
퇴근길에 동네 슈퍼마켓을 지나는데, 바구니에 담겨있는 복숭아가 눈에 들어왔다.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바구니 앞 상자에 매직으로 적힌 '한 바구니 5,000원'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종대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1시간 동안 먼지 구덩이 속에서 고온의 화염과 싸워야 얻을 수 있는 복숭아 3개가 고단했던 지난 한 달을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쁘지만도 않았다.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득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노동자들은 매월 자신의 고단함을 평가하는 성적표를 받는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의 어깨는 당당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초보 노동자는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첫 한 달은 우수했으며 팀 내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보였다.
기술이 없었기에 몸으로 때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들 눈에는 좋아 보였나 보다.
사진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