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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선 Aug 22. 2024

그리움도 사치스러운 날 ( 6 )

미래에 투자하다. 

그는 어느덧 기러기 생활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처음 조선소에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을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다.

그동안 생활도 점점 안정화되었으며, 주말에는 빠짐없이 가족을 만나러 갈 여유도 생겼으니,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를 경계하던 선임들도 하나둘씩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가 멈추지 않고 늘 변화를 갈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작업자들의 불안전한 작업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관습들이 작업자뿐만 아니라 관리자들에게도 남아 있었고,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려는 태도가 팽배해 있었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과거 자신의 오만함이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그는 안전과와 탑재팀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안전과에는 안전 관리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 가면 안전에 관한 자료들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탑재팀에서는 공개 도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 반장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선종별 도면을 비치해 두었지만, 종대를 제외한 누구도 그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종대는 용접을 배울 때처럼 알고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보고 또 봤다.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니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이 블록이 어디에 붙는 것인지,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 그리고 사용했던 블록의 정식 명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물론 도면을 본다는 건 지금으로선 특별히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작업자는 도면을 보면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업 지시가 내려오면 딱 그 지시까지만 하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고, 작업자 스스로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설령 도면을 보고 남들보다 안전의식이 투철하다 하더라도 특별수당이 붙거나 보직 변경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배우고자 했다.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 말고도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하나는 일반 작업자들과는 다른 차별화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관리자 TO가 생기면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투자였던 것이다.

그는 입사 초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에서 이미 증명되었듯,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을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도면을 보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체크해 두었다가 탑재팀 선배님에게 물어보기를 반복하며 1년이 지났을 때, 사무실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봉오 아저씨가 본청 탑재팀 새내기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봉오 아저씨는 오래된 경험과 연륜으로 필요 없다고 판단해 러그 하나를 제거했고, 탑재팀 새내기는 그러면 안 된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이럴 때 김 반장이 병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시시비비를 가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십 년 해왔지만, 저거 쓰는 걸 못 봤다." 봉오 아저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치자, 탑재팀 새내기도 물러서지 않았다.

"뭐요! 아저씨, 내가 맞다면 맞는 거지 뭔 말이 그리 많아요. 아무튼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뭔 노인네가 저리도 고집이 센지 도무지 인정을 안 하네... 도면에 사용한다고 나와 있는데 뭘 안다고 우겨요?"

둘의 신경전이 이어지며 퇴근 전 작업자들이 한 대 몰려와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때 종대가 호기롭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 도면 좀 봅시다." 

도면을 빼앗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에 있던 다른 팀원들까지 몰려와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종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주임님이 잘못 보셨네요. 그건 자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 역시 물러서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뭐 좀 보십니까? 어떻게 이게 자르는 겁니까?" 그가 따지듯 대들었다.

좋게 이야기해도 될 일을 젊은 친구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기어코 이길 심산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아니꼽게 보였지만, 종대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대 역시 물러설 마음은 애당초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평정심을 잃어버리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더욱 참기 힘든 일이었다.

"주임님 말대로라면 이곳에 대문자로 표기해야 맞아요. 하지만 지금 그건 소문자로 적혀 있잖아요. a-1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소문자 a는 PE장에서 사용되는 것이고, 뒤에 1은 1차까지만 사용된다는 말인데, 지금은 이미 블록이 탑재된 상태입니다.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말입니까?"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얼마 전 즐겨보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이런 말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죽어버려라." 조금은 극단적인 대사였지만 어느 정도 동감하기도 한다. 

그날부터 아무도 그를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으며, 그날의 사건이 관리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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