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해방되기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는 이제 그만

by 조이

이미 다 커버린 어른에게도 어린 시절이 중요할까? 심리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흘러간 줄 알았된 과거는 우리의 일부가 되어 우리 안에 남는다. 사람의 성격 형성에 어린 시절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많은 연구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성격은, 본래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어린 시절의 환경이 상호작용하며 형성된다. 마치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나가듯, 성인이 될 만큼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겪는 많은 경험과 자극은 우리를 만들어간다. 이런 형성 과정은 무의식적인데, 우리가 세상에 나오며 선택할 수 없는 문제들, 가령 국가, 성별, 부모, 문화, 인종, 경제수준과 같은 요인들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치 랜덤한 환경에서 랜덤한 캐릭터로 플레이하도록 되어있는 게임 같달까? 80억 세계인구 모두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생을 살아가고 있다. 자기 삶을 두 번 살 수도 없고 남의 삶을 살 수도 없다. 80억명은 80억개의 각자 다른 삶을 살며 80억 개의 성격과 인격을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형성된 체계는 좀처럼 바뀌기 쉽지 않다. 이런 저런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견고하게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폭력, 가정불화나 가난 등으로 양육환경이 불안정한 경우 성격형성 과정에 데미지를 입는 것은 물론 건강한 관계를 경험하기 어렵게 된다. 문제는 생애초기 경험한 관계패턴은 생애를 통해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데이트 폭력을 당해 전남친과 힘들게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비슷한 질 나쁜 남자를 만나는 여자. 바람끼 있는 여자친구를 견디다 못해 헤어지고서도 또 비슷한 여자를 만나는 남자.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에게서 독립해 알콜중독자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 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이런 모순을 얼핏보면 어쩜 저럴까 싶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극복하지 못한 과거는 계속 재생되는 습성이 있다. 한 번 겪은 걸로도 충분히 괴로운 과거를 도대체 누가 계속 재생한다는 걸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저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 힘이 없을 때 너무나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아이는 깊은 상처를 안고 마음속 깊숙이 숨어 버린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성장하기를 멈춰 버린다. 그렇지만 그 아이도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과거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거나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고통만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려고 책상에 앉은 똘똘한 아이처럼 사람은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그 상황을 자기도 모르게 연출한다. 이번엔 틀리지 않고 꼭 정답을 맞출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고통 속으로 다시금 뛰어든다. 과거에 경험한 상처가 영혼의 성장에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그러면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영원히 고통스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상담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잠깐 소개해본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집안 집기를 부수고 아내를 때리는 주정뱅이였습니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늘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린 자기가 보기에도 엄마가 언제 집을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남자는 엄마의 희망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엄마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착한 아들이 되기로요.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만 보여줍니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엄마에게 자신이 짐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죠.

이 남자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특유의 성실함과 배려심으로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밝은 성격과 매력적인 외모로 인기 있는 여자 A가 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몇 번 만나보니 여자 A가 괜찮고 매력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확 끌리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이 남자는 팀원 중 자꾸 주눅이 들고 어리바리한 여자 B가 자꾸 신경 쓰입니다.

여자 B를 자꾸 도와주고 일을 대신 맡아서 해주고 하다 보니 그녀와 가까워져 연인이 되었습니다. 안그래도 의존적인 그녀는 연인이 된 후 더욱 심하게 의존해 옵니다. 주말에 친구도 못 만나게 하고 취미생활도 관두고 항상 자기만을 신경 써 주기를 바라는 그녀에게 갑갑함을 느낍니다. 그런 남자에게 남자의 친구들이 조언합니다. 이제라도 다시 여자 A를 만나라고. 남자는 여자 B에게 갑갑함을 느껴 여자 A를 만나려 하다가도, 여자 A를 만나면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여자친구들이 모두 여자 B와 같은 스타일이었음을.

어린 시절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는 관계패턴을 결정한다. 이 남자는 엄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맞춰나가면서 엄마의 기쁨이 되고자 했고 이것이 관계패턴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 이 남자는 대하는 모든 사람과 이 패턴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가장 자신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자신이 왜 이렇게 항상 퍼주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것이 버거울 때도 많지만 그것 외에 달리 행동할 줄 모른다. 자기를 소진해서라도 도움이 되려고 하는 이 남자에게는 점차 의존적인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귀신처럼 서로 착 달라붙는다. 이 관계는 아마도 남자가 퍼주다퍼주다 바닥까지 박박 긁고나서 더이상 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끝날 것이다.


위의 이야기의 남자는 양육환경이 좋지 못해 건강한 애착관계를 경험할 수 없었다. 집을 나갈지도 모르는 불안한 엄마에게 모든 힘을 다해 기쁨이 되고자 노력했던 필사적인 삶이었다. 남자는 건강한 관계를 경험할 수 없었다. 양육환경이 안정적이었다면 부모 또는 다른 중요한 타인과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며 건강한 관계패턴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겪은 양육환경에서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이자 최선의 선택지였을 수 있다. 이 남자는 이런 이유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엄마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성에게 무의식적으로 끌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과거의 패턴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반복한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어릴 때 획득했던 그 패턴을 자기도 모르게 계속 재현한다. 가정에 도움 되는 착한 아이로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아이가 커서 직장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도움이 되려 하고 그렇지 못할 때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서도 또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게 되는 이유, 어릴 때 편애로 사랑받지 못했던 자식이 오히려 부모를 더 돌보려고 하는 경우들도 같은 맥락의 경우들이다.




불교에는 '직시直視'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 자신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저렇게 바뀌면 좋겠다, 이래서 저래서 좋다/나쁘다 같은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그냥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시'는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의식해보자. 내가 나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수용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서 자기 마음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스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옳지 못해.', '이런 감정을 느껴야지 왜 저런 감정을 느끼는거야?'와 같은 식으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사람이라면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한다. 그게 사람이다. 억지로 한쪽을 누르며 사는 성직자들이 각종 성범죄로 뉴스를 심심치 않게 장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생각은 떠오를 수 있다. 다만 더 나아가고 싶은 생각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쓸데없는 생각은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 뿐이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 자신에게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가 나 자신의 어떤 모습이라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직시에 조금씩 익숙해져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보면 평생 모르고 살았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같이 있는 사람들을 기분좋게 해주려는 습성이 있었다. 대개는 이런 나의 습성이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불평이 많고 만날 때마다 하소연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대책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위로를 해주고 응원을 해주어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그런 사람과 만나고 나면 소위 '기가 빨려서' 힘들면서도 나는 그들을 기분좋게 해주고 싶어 계속 그들을 만났다. "널 만나면 힘이 나."라는 소리에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느꼈다가도 어느 날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소리라도 들려오면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나는 왜 타인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면 기저에 깔고 있었을까? 혹시 어린 시절 어두운 표정으로 하루종일 뜨개질 하는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까지도 대상을 달리하며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같이 있는 사람들의 기분에 민감한, 그들의 기분이 좋아야 안심하는 나의 습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은 그 사람의 몫이다. 나의 습성을 아는 것 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 이제는 마주한 어떤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도 별로 영향받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감정이 내 몫이 아님을 알면 편안한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위로를 건넬 수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 살면서 어떻게 기분 좋은 일만 있겠는가. 절반은 웃고 또 절반의 날은 찡그리는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이런 습성이 있구나.'

'이런 습성은 이래서 생겼겠구나.',

'나는 이런 면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게 나 자신에게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자기 돌봄의 초석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런 자신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편할 수 있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자기 돌봄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돌봄을 지속하다보면 어느새 불편했던 과거의 흔적들이 점차 옅어지고 비로소 현재에 머물 수 있게 된다.


ⓒHN Works, 출처 adobe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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