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순애보(殉愛譜)도 알고 보면

로잘린드의 반박, 『좋으실 대로』에서

by 램즈이어 Mar 06. 2025
아래로

 셰익스피어를 이제야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부분은 여 주인공 캐릭터다. 하나같이 요즈음 여성처럼, 아니 21세기 보다 더 당당하다.

 『좋으실 대로』에 나오는 로잘린드는 마치 엊그제 주말 드리마에 나옴직한 시니컬한 대화를 사촌 동생 실비아와 주고받는다. 이 중에서 남자들의 순애보를 믿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


## 레안드로스에 대한 진실

      

 역사가들의 이야기: 아비도스에 레안드로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해협 (헬레스폰토스) 건너편 세스토스라는 도시에는 헤로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레안드로스는 이 헤로에게 반했던 나머지 매일 밤 이 해협을 헤엄쳐 건너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곤 했다. 폭풍이 일어 바다가 사나워진 어느 날 밤, 레안드로스는 기력을 잃고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의 시체가 유럽 쪽 해안으로 밀려왔을 때야 헤로는 그가 죽었음을 알았다. 헤로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탑에서 바다로 투신하여 애인의 뒤를 따랐다.*

      

로절린드: 불쌍한 이 세상은 거의 육천 년이 되었지만 그 기간 내내 그 누구도 본인이 (사랑 때문에) 직접 죽진 않았어요. 레안드로스는 더운 한 여름밤이 아니었더라면 헤로가 비록 수녀가 됐을지라도 족히 여러 해를 더 살았을 거예요. 그 착한 젊은이는 헬로스폰투스에 (너무 무더워) 몸을 씻으러 간 것뿐이었는데, 쥐가 나서 빠져 죽었고 그 시기의 어리석은 역사가들이 판결을 내렸죠. 세스토스의 헤로 때문이라고.   

 

 픽션에 근거한 셰익스피어의 반박이지만 논리가 없지는 않다. 날마다 만나러 간 일과였다면, 어느 날 순전히 목욕을 위해서 바다에 갔을지라도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언니인 매지의 구혼자


 애거서의 자서전에는 나이차가 많은 언니 매지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언니는 무척 아름답고 (애거서가 부러워할 만큼) 재기 발랄하여 뭇 남성들의 사랑과 구혼을 받았다. 심지어 글쓰기 능력도 애거서 월등했다고.      

 이모할머니는 매지 언니의 구혼자 중 한 명(암브로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젠가 매지가 테라스를 산책하고 나자 암브로스가 일어나 테라스로 가더구나. 그이가 글쎄 몸을 숙여서는 매지의 발이 닿은 자갈 한 줌을 집어 자기 주머니에 넣지 뭐니. 얼마나 낭만적이던지. 젊었을 때 나한테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상상했단다.”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이모할머니. 우리는 이모할머니의 환상을 깨트려야 했다. 암브로스는 지질학에 무척 관심이 많아 그 자갈의 특이한 형태에 매혹되었던 것이.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에 나오는 이모할머니 이야기, 논픽션) **     


## 인서울 어느 대학 산악반에서

    

  3월 첫 일요일 산악 반 산행 후에는 가십이 뜨거웠다. 화제의 남녀 주인공은 신입 멤버 철희와 일 년 선배 혜진이다. 그날따라 혜진은 유난히 볼록하고 무거운 백 팩을 들고 왔는데, 철희가 북한 산 등반 내내 그것을 들어주었다는 스토리다. 나란히 산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철희는 빠르게 앞섰다가, (거의 달리는 수준으로) 다시 돌아와 가방에서 생수 등 개인용품을 빼고자 하는 혜진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그날 이후 훈남인 철희의 일거수일투족은 여학생들의 레이다 망에 촘촘히 잡히고, 소리 없이 전파되었다. 봄 산행에서 두 번 더 혜진의 백 팩 들어줌. 그러나 강의실 등 주변에서 썸의 징후는 없음. 돌연 철희가 산악 반을 탈퇴함. 남자 주인공이 사라졌건만 여름 내내 산악반 가십에서 오히려 더 스토리가 풍성해졌다. 혜진이 철희를 찼다, 철희가 방황하느라 수업을 많이 빼먹는다 등등. ‘파마(fama)’라 불리는 소문의 여신은 상상과 과장을 장기(長技) 삼아 가을까지 머물렀다. 교내 신문에 철희 사진과 인터뷰 내용이 실리기까지.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를 다.”라는 타이틀의 울트라 마라톤 완주 기사였다. 어떻게 준비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이 있었다.

“북한산도 청계산도 한없이 달렸죠. 동료들무거운 백팩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지고서요. 훈련 시간이 딸려 수업도 좀  땡땡이를….”            (아들 대학 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논픽션 + 픽션)  

    

  로잘린드는 순애보를 믿지 않았으나 결국 순수한 사랑을 얻으며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녀의 냉철한 지적대로 사랑의 영웅담 중에서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오해나 부풀려진 이야기가 꽤 있을 것이다.


---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윤기, 웅진지식하우스 2020 (p473)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애거서 크리스티,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2014

    셰익스피어 전집 1권『 좋으실 대로』최종철 옮김, 민음사

   대문의 그림 사진: <프랑스 정원에서 꽃 따기> 차일드 하삼, 캔버스에 유채, 71.1X55.1, 1888,

                            우스터 미술관 :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전시회에서

이전 04화 프리미어 리그는 한참 멀어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